이정근 국립공주박물관장
이정근 관장은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고고학자이다. 2000년 입사한 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국립김해박물관장 등을 거친 박물관 전문가로 그동안 가야문화의 복원사업과 가야사를 일반 대중에게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일에 많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예,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이정근입니다. (방청객 환호와 박수)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한 두 달? 석 달 전에 공산성에서 강연하는 걸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실 굉장히 부담이 되서 처음에는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사를 했는데 결국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 제가 들려 드릴 이야기는 ‘공주와 공주박물관’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공주박물관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라고 하는 부분, 그리고 공주에서 공주박물관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 예정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의 물건 사진이 있습니다. 이 두 사진을 제가 첫 번째에 올렸는데요, 이 두 사진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거는 수십만 년 전 우리나라에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만들어 쓰던 돌로 만든 도구, 이거는 지금 아마 핸드폰이라고 일반적으로 얘기하는데 주머니에 한 개씩 다 가지고 계시는 것, 이 두 가지인데요, 이것에 대한 얘기는 강의 마지막에, 비가 안 와야 될 텐데 강의 마지막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박물관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박물관에서 하는 행사, 전시 등등 느낌, 감정,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글이 이겁니다. 제가 딸과 아들이 있는데요. 둘의 의견이 공통되더라고요. 뭐냐 하면 ‘박물관'하면 어렵다, 재미없다, 다리 아프다, 아빠는 보기 힘들다, 고로 절대로 가면 안 된다. (방청객 웃음) 사실 제 딸이 고등학교 교과과정 중에서 성적이 제일 안 나오고 가장 싫어하는, 싫어하는 게, 증오하는 과목이 한국사입니다. 예,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그런데 많은 분들이 박물관 하면 전시라고 하는 걸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게 전시이고, 어느 박물관 했을 때 전시명을 얘기하든지 거기에 전시실에서 봤던 어떤 물건들을 아마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아요. 실제로 박물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 전시가 전쟁 중이라고 하는 전시하고 똑같이 저희들은 씁니다. 이게 전시가 진짜 전시야~ 이렇게 저희들이 농담을 하거든요. 그만큼 전투적으로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박물관에 오시는 관람객 여러분들이 좀 더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박물관에 어떤 사업보다도 전시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꽃에 비유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꽃이라고 한다면 전시가 그냥 혼자 존재할 수 없잖아요. 꽃을 피우기 위해 줄기도 있어야 되고, 잎도 있어야 되고, 뿌리도 있어야 됩니다. 박물관이 어떤 식물이라고 치고, 그 꽃이 전시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게, ’아! 꽃 이쁘네‘하고 지나가지만 ’잎이 몇 개네~, 줄기가 어떻네, 튼튼하네, 뿌리가 잘 내렸네~‘ 이런 이야기는 안 하시잖아요.

<공산성 달밤에 이야기하고 있는 이정근 관장>
우리나라에 박물관이 몇 개 있는지 아시나요? 아니요 설립 주체에 따라 국립, 공립, 대학, 사립 등등 여러 박물관들이 있습니다. 엄청 많이 있겠죠. 많~이. 천 개쯤 있습니다. (방청객 놀람) 문화체육관광부라고 하는 부서가 박물관도 관리하는 부서라고 친다면 거기에 확인된 것만 천 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신고 안 하고 그냥 박물관 운영하는 데도 있어요. 1000개가 넘는다는 얘기입니다, 그죠? 국립박물관은 한 수십 개에 되고요, 문화체육관광부 안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고 그 밑에 공주박물관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외에 지방박물관, 지방국립박물관이 우리나라에 13개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제 아무래도 여건이 국립박물관이 좋다고 한다면 충청도에도 있고 제주도에도 있고 강원도에도 있는데, 어느 박물관에 가서 보다 ’아, 여기가 공주박물관의 가장 특색 있는 거다‘라고 생각되는 것의 두 가지를 자랑하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아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상설전시실이라고 아마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해방 이후 지금껏 바뀌지 않은 최대의 발굴지는 “무령왕릉”
무령왕릉이 1971년도에 발굴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무령왕릉의 발굴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의 기사에 ’해방 이후 최대의 발굴이다‘ 이런 식의 얘기를 했는데 아직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아직도 최대의 발굴은 무령왕릉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 이 두 개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당시의 사진 여러 장이 있지만, 사실 사진 많습니다. 박물관에 오시면 상설실 옆에 보면 모니터로도 볼 수 있고, 옆에 작은 사진으로 쭉 되어 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진도 있을 테고요.
두 사진이 가장 대표하는 사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입구를 막은 벽돌, 그걸 여러사람들이 한 개씩 한 개씩 꺼내는 장면입니다. 또 하나의 사진은 돌로 만든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하나 만들어져 있고, 그 앞에 네모난 돌로 만든 판 두 개, 그 위에 동전 꾸러미가 놓여져 있는 사진입니다.
이 입구를 열고 들어갔더니 이렇게 무덤 방이 나오고 그 안에서 5천 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습니다. 그 5천 점의 유물들은 금으로, 순금 99점 몇 퍼센트 해당되는 순금으로 만든 관장식을 비롯해서 귀걸이, 용이 새겨진 장식된 칼 등등 해서 5천 점이 넘는 유물, 그 유물 하나하나가 굉장히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유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모두 다 공주박물관에 와서 보실 수가 있습니다.
경주의 대릉원이라고 하는 곳이 무덤입니다. 여기가 봉황대라고 불리는 무덤이고, 얘가 지름이 80m, 높이가 한 25m쯤 돼요. 이 무덤은 황남대총이라고 불리는데 남북으로 길이가 120m예요. 거기에서 유물이 몇 점 나왔느냐? 무령왕릉 몇 점이라고 말씀드렸죠? 5000점, 저기는 만 단위로 나왔어요. 그럼 금의 양이 무려 왕이 많냐? 아닙니다. 엄청나게 저기가 더 많아요. 이거를 단순하게 무덤의 크기, 몇 점의 유물이 나왔느냐, 이걸로 비교하면 무령왕릉보다 더 큰 무덤, 더 많이 나온 유물들이 많다는 거죠. 경주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사진을 보고 한번 얘기를 해볼게요. 두 점은, 비슷한 시기, 그냥 대충 비슷한 시기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칼인데, 두 개 다 용, 또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고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칼인데. 하나는 길이가 113센티, 하나는 82센티. 실제로 뭐가 금이 더 많이 들어갔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게 상태가 좋아 보이나요? 위의 것, 어느 게 긴가요? 위에 거. 무령왕릉 거는 어느 걸까요? 밑에 거. 아, 박물관 오셔서 열심히 보셨네요, 밑에 게 무령왕릉입니다.
이 사진, 혹시 아마 어린 친구들을 두신 분들은 많이 아실 텐데, 어떤 한 회사에서 나온 야구공입니다. 하나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만 사백 원 해요. 하나는 1억 2천 500만 원에 경매가 됐데요. 여기 자세히 보니까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친 50호 홈런볼이라는 거예요. 똑같은 재질로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을 수 있겠죠. 만들었던 야구공인데 하나는 만 원짜리, 또 하나는 1억 2000만 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 이유가 뭐죠? 이승엽이 홈런을 친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무덤에서 출토된 거고요, 사실 위의 것은 누군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조금 쉽지 않을까.
앞서 제가 동물을 자꾸 얘기 드렸는데, 동물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네모난 판, 박물관 전시실에 이렇게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무덤을 만들 때도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유물이었고, 박물관에서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유물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내용을 보면 ’백제 사마왕께서 523년에 돌아가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경주에 그 많은 무덤들이 실제로 뭐, 박혁거세의 무덤이고,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고, 누구의 무덤이고 누구의 무덤이고 이런 얘기를 하지만, 그것은 거의 추정에 불과하고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겁니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유물입니다.
그런데 무령왕릉만큼, 삼국시대의 유물 중에서, 특히 왕의 무덤 중에서 그 주인공이 분명하게 역사기록과 일치되는 무덤은 아직까지 무령왕릉밖에 없다.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고요. (방청객 환호와 박수)
여기에 하나 더 더하자면, 지금까지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물들은 그것을 소위 말해서 검증받기 위해서 문헌에 기댔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에 없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어요. 오히려 문헌을 보완해 주는 역할로서의 무령왕릉 출토품들은 그것을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박물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 질문
박물관 와서 이 동물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물으십니다. 여기에 너무 많은 아시는 분들이 많이 와서 좀 부끄럽습니다마는, 이 동물을 어떤 관람객들이 “무슨 동물이에요?”라고 물어요. 그래서 “어떤 동물 같아요?” 그랬더니 “공주는 곰이니까 곰입니다”라고 얘기하는 분,
두 번째는 “생긴 것 자체가 돼지처럼 생겼다~ 돼지입니다.” 작년에 푸바오가 등장했어요. 작년에 푸바오가 인기를 막 끌면서, 보니까 푸바오하고도 담긴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실제로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하고 똑같은 거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사자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이게 실제로 돼지처럼 생겼지만 하늘을 날고 뿔이 달려 있고, 등등. 이렇게 상상 속에 존재하는, 무령왕릉을 지키는 동물인데요.
깨진 부분이 보일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71년도 사진을 봤더니 깨져 있어요. 그래서 이걸 왜 깨졌을까? 라고 하는 질문을 했더니 많은 분들이 어떤 얘기를 하냐면, 이게 한 40키로 정도 나가는데요, 들고나오다가, 무덤 입구는 좀 좁으니까 들고나오다가 떨어뜨렸다 라고 얘기를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71년도에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굉장히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 사진은 자세히 보시면 깨진 면이 금방 떨어져서 깨진 면이 아니에요. 아주 오래전에 깨졌던 겁니다. 이것은 실제로 무덤에 들어갈 때 이미 거의 깨졌거나 최근에 71년도에 깨진 건 아니다 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고, 그것들을 저희들이 회기(回忌)라고 하는 얘기로 합니다.
무덤을 지킨 진묘수의 다리가 왜 부러졌을까?
지난해에 공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무령왕의 장례‘ 특별전을 했었는데요, 그때 ‘회기’라는 단어가 등장을 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승과 저승은 다르니까, 여기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거는 저기 가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온전한 물건은 저기 가서 쓸 수 없고, 여기에 파손된 거는 저기 가서 제대로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동물의 다리를 부러뜨려 가지고 의도적으로 무덤에 매장을 했을 텐데, 저희들은 어떻게 얘기를 하냐면, 1500년 동안 무덤을 지켰잖아요.
실제로 박물관에 오시면, 중앙홀에 가시면, ’진묘수의 산책‘이라고 하는 영상이 틀어져 있습니다. 핑크빛의 들판을 꽃 사이를, 마치 정신이 조금 온전치 않은 동물처럼 막 구르고 뛰어다니고 펄펄 날았다가 이렇게 하는 진묘수가 등장하는데요. 그 영상을 만들 때 뭐라고 저희들이 농담으로 얘기했냐면, 1500년 동안 무덤 앞을 지키느라 얼마나 지루겠습니까? ‘무령왕 장례한다고 딴 데로 출장을 갔어요, 무령왕의 관과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진묘수 얼마나 자유를 얻어서 1500년 만의 휴가 아니냐~ 그래서 제정신이겠냐? (방청객 웃음) 그래서 저런 상태가 맞을 것이다. 저희들은 이런 농담으로 하고, 그냥 약간 장난으로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리가 온전하게 도망가니까 도망 못 가게 부러뜨렸겠죠’ 라는 농담을 합니다. 사실 그렇지는 않고요, 저 회기라고 하는 행위로서 여기에 다리가 부러졌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최고를 자랑하는 공주 수장고
공주박물관. 다른 박물관 가서 절대로 볼 수 없고, 박물관 공주만의 가장 특색이 있는 것, 저는 이 충청권역 수장고라고 생각이 됩니다. 서울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방에서도 거의 보기 힘듭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은행가면 제 통장 잔고보다 더 궁금한 게 저 커다란 금고문 뒤에 돈이 얼마나 모여있을까? 그걸 가져오고 싶은 생각보다도 그냥 궁금한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박물관을 온 관람객들도 많은 분들이 전시실에 있는 유물을 보시지만 소장관이 궁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봐요. 그래서 ’그냥 과감하게 수장고 내부 한번 보여줍시다‘라는 결정을 언제 했냐면 2010년 무렵에 했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한 게 우리나라에서는 국립나주박물관입니다. 2013년도에 개관했는데요. 사실 이거는 수장고 보여주는 게 약간 불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벽에다가 유리창 하나 만들어놓고 이렇게 몰래 훔쳐 보는듯한. 규모도 작고, 그렇게 처음 시작을 했다가 본격적으로 박물관 수장고를 대놓고 보여주기 시작한 게 언제냐면 국립경주박물관 2019년부터 입니다. 19년 그리고 21년에 민속박물관 파주관이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수장고 라고 볼 수 있고요.
공주박물관은 민속박물관 파주관보다 조금 더 늦게 개관을 했는데요, 장점이 뭐냐 하면, 이 앞에서 했던 실수 다 보완하는 내용으로 만들었습니다.
공주박물관 수장고 이후에 다시 보여주는 수장고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보여주는 수장고와 관련해서는 공주박물관이 제일 잘 돼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수장고 이야기
수장고 문을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이거 가시면 보실 수는 있는데 은행문하곤 좀 다릅니다. 작은 문이 하나가 있어요. 작은 문이 왜 있을까요? 큰 문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문을 많이 만들면 사실은 침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데, 두 개를 만들었어요. (방청객 : 사람이 있으니까~) 아~ 맞습니다. 아~ 역시. 이 수장고 안에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모르고 문을 잠궈버릴 수 있잖 아요. 작은 문은 뭐냐면 안에서 열 수 있는 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 큰 문을 열면 생기는 문제가 뭐냐면 그 안이 온도와 습도와 같은 것으로부터 안전한 상태로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세 번째는 이 문 안에 들어가면 수장고 문을 열면 문이 하나 또 있어요. 여름철에는 이 벌레들도 해충들이 많잖아요. 수장고 안에는 토기나 돌로 만든 유물같은 경우는 괜찮은데 나무로 만든 것, 종이로 만든 거, 이 문을 자주 개방을 하게 되면 혹시나 그런 해충들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겠죠. 그래서 문을 이중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작은 문을 주로 더 많이 사용하고.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은, 물론 은행에 하겠습니다마는, 그냥 옛날에는 다이얼과 열쇠만 해서 핸들 돌렸는데 요즘에는 지문, 홍채, 안면인식, 카드, 각종 첨단 보안과 관련된 것들을 다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인데 열어서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겠다 이거죠.

근데 관장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공주박물관 관장인데요, 수장고 가고 싶은 데를 막 갈 수 있을까요? (방청객 : 예~, 못 가요~) 못 갑니다. 직원을 동행해서 항상 가야 되고요, 혼자는 절대로 못 들어가고요, 지금 제가 여기에 공산성에 오면서 신발에다가 다른 오염물질이 묻었을 수 있잖아요. 이 신발 신고 박물관 들어왔는데 나 수장고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장고가 오염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많은 관람객들이 충청권역 수장고 와서 수장고 내부 보시고 또 하나 재밌다,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공간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충청 1만 년의 역사가 이 한 관에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신석기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조선시대까지의 그릇들만 여기서 쭉 모여져 있습니다. 충청 1만 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코너이고 실제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관람객들이 여기서 사진도 많이 찍으시구요, 기념 촬영도 많이 하시는데,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면 이거라고 생각해요. 글자가 없습니다.
제가 글을 좀 줄이자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핸드폰 보면서 서울에서 서울 기준으로 지하철 탈 때 한 시간 출퇴근하면 맨날 핸드폰 봅니다. 사무실 9시부터 6시까지 앉아 있으면 계속 무슨 페이퍼를 보고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고 뭔가 글자를 치고 글자를 읽고 그 작업을 하고 저녁에 가서 뭐 집에서 잠시 드라마를 볼 수 있겠죠. 근데 주말에 내가 박물관에서 좀 쉬자~ 이러고 박물관 갔는데 또 글자를 이만~큼 달아 놨어요. 거기다가 요즘에는 또 다 읽지는 않습니다만, 외국인 관람객을 위해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만들어 가지고 글자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 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박물관에 좀 글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공간은요 제가 오기 전에 만들어졌는데 글자는 이겁니다. 누림 13-1, 이게 답니다. 그냥 QR코드 하나 찍었어요. 내가 궁금하면 핸드폰 갖다 대면 찍으면 거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필요한 사람들만 보는 거죠. 요 안에 공간에 거의 글자가 없다. 1만 년의 역사는 글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고요.
충청권 수장고 약간 자랑해 드리면, 140만 점 정도의 유물을 넣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넣는 크기에 따라서 그보다 더 넣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현재 얼마큼 차 있냐면 30%, 3분의 1도 차 있지 않습니다. 충청남북도뿐만이 아니라 경기도의 유물까지도 보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년 만 점에서 2만 점 정도가 새롭게 들어 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면 아, 이게 몇 년 정도 더 걸리면 완전히 찰까,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운영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단순 수량으로 치면 국립중앙박물관, 경주박물관 다음으로 박물관 안의 유물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 3위에 해당되는 유물 보관 기관이다라고 할 수 있고요.
박물관 유물관리 과정
이제 줄기와 잎과 관련된 줄기와 잎과 관련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박물관의 다양한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유물 관리, 보존처리, 조사, 연구, 전시 작업, 그리고 교육, 행사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먼저 유물 관리입니다. 박물관의 유물이, 구입을 했든 발굴했든 어쨌든 간에 외부로부터 박물관에 유물을 가지고 오게 되면 이걸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박물관에 보관하게 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드릴 텐데요.
이 작업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은 뭐냐 하면, 지금 다 주민등록번호 갖고 계시죠. 동사무소 가면 떼면 다 나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등록이 안 됐다면 출생신고가 안 된 사람인 겁니다. 그러면 학교도 못 가고 병원도 가기 힘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거죠. 그와 똑같습니다.
박물관에서 유물 관리에서 유물 등록과 관리가 되지 않으면 다른 쪽에 활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물 관리가 박물관의 모든 사업 중에서 가장 기초되는 작업입니다. 외부에서 큰 차에 실려 박물관으로 이동을 하는데요. 수장고 입구에서 먼저 유물 상태가 원래 들어오겠다고 했던 그 사진과 맞는지를 확인을 합니다. 어디가 약한지 이런 것들에 대한 기록들도 다 하게 되고요. 그리고 훈증을 하게 됩니다.
훈증은 왜 할까요? (방청객 대답) 맞습니다. 그게 미생물이라든지 세균이라든지 안 좋은 부분들이 포함되어서 같이 딸려올 수 있습니다. 저희 공주박물관에서 생산된 생산한 물건이 아니라 어느 땅에서 발굴했고 또 어느 기관을 거쳐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이러한 공간에다가 넣고 가스를 넣고 독가스죠, 그걸 가지고 다 훈증을 하게 됩니다. 깨끗하게 만든 다음에 요렇게 유물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번호를 부여합니다. 번호라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넘버링이라고 저희들이 얘기하는데 유물에다가 이렇게 번호를 매기게 됩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진 촬영을 하고요. 그리고 격납 준비를 위해서 상자에 다 이렇게 담습니다. 물론 편들이기 때문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진 촬영은 사람으로 치면 여권 만들 때 증명사진 찍는 거하고 똑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수장고에 격납하는데요. 그 과정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전산 입력하는 게 들어갑니다. 박물관에 가셔서 한번 보시면 이 격납장이라고 불려지는 하나의 장에 번호가 있고 거기에 몇 단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뭐가 들어가 있냐면 유물이, 해당 유물이 어느 수장고에 몇 번째 격납고에 몇 번째 장에 어디에 있다, 이런 것까지 다 기록이 되고 찍었던 증명사진 포함해서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어디 보관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건 뭐냐 하면 외부에 빌려주면, 예를 들어서 서울 중앙박물관에 빌려주면 서울 중앙박물관으로 즉시 또 입력을 또 바꿔야 되겠죠. 그런 작업들을 이제 박물관에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야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보존처리입니다. 부서지거나 부식된 유물들이 많이 발굴이 되거나 아니면 가만히 두더라도 부식될 텐데요. 이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거나 또는 더이상 파손되지 않는 작업, 않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유물 등록과 마찬가지로 조사 연구라든지 전시라든지 다른 박물관 업무를 하는데 반드시 수행해야 될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발굴현장에 가면 유물들이 노출됩니다.
실제로 흙이 덮혀있어 흙만 제거했는데 토기는 다 깨어져 있고 철기는 전부 가루가 되어서 가루가 되다시피 해서 부서져 있습니다. 이대로 과연 연구가 되고 전시하거나 이런 활용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이 보존처리 과정을 거치면 일반 관람객들이 보실 수 있는 거죠.
그 과정을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금속유물이라 치면 굉장히 오염물질이 붙어 있고 녹이 붙어서 있을 수도 있죠. 그런 것들을 제거를 한다든지, 과학적인 어떤 장비를 이용해서 재료가 뭔지, 서화(書畫)같은 경우는 배접지(褙接紙) 제거라든지 이런 사전 작업들을 진행하게 됩니다. 표면 코팅이라든지 불필요한 부분들은 제거하는 것, 그리고 없는 것들을 복원하는 것,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질 수 있고요. 그리고 여기에 또 사람이 엑스레이 찍는 거와 마찬가지로 유물도 엑스선 또는 CT 기계를 이용해서 내부를 관찰해서 보존처리에 활용하고 또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자료로 만들어 냅니다. 이 과정들을 거치게 되며 이렇게, 이렇게 파편으로 존재하던 청동 그릇이 이렇게 바뀌어지는 겁니다. 이런 불상들, 다 깨진 것들, 요렇게 만들어지고 옷도 이게 다 찌그러지고 했는 것들을 쉽게 말하면 다림질도 하고 해서 요렇게 전시할 수 있는 상태, 그리고 연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공주니까 백제와 관련된 유물입니다. 제가 그래서 이거 보통 이런 자료들을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존처리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저런 자료를 막 받았는데 그래도 공산성에서 그래도 공주박물관 얘기하는데 공주박물관 유물을 좀 넣어야지 해서 찾아본 게 무령왕릉 신발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박물관 가시면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다 깨끗하게 제거한 건 아니지만 신발 모양으로 되어 있죠. 71년대 사진을 찾아봤더니 이래 됐습니다. 막 찢어지고 구겨지고 해서 이렇게 돼서 이게 신발이라고 하니 신발처럼 이해하지 실제 신발인 것처럼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93년도 전시 사진을 봤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조금 보존처리가 됐죠. 그 뒤에 아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93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과정 속에 이렇게 보존처리가 되어서 전시를 하고 있다. 그냥 무령왕릉 신발만 제가 예를 들었을 뿐이지 상당수 유물들이 실제로 저런 과정을 거쳐서 전시가 됩니다.
다음 조사 연구입니다. 가장 발굴조사를 제일 많이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공주분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마 이 정지산 유적발굴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저희들이 있는 데서 바로 서쪽에 있는 발굴 유적이죠. 다양한 국내 발굴조사뿐만이 아니라, 정지산 유적발굴 사진들 몇 장을 한번 해봤습니다, 국외조사도 많이 수행을 했습니다. 최근 것들만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일본에 있는 백제와 관련된 문화재, 문화유산은 뭔지 이에 대한 조사도 여러 번 했고, 중국 등 외국에 있는 백제와 관련된 유물들, 문화재, 문화유산들을 아마 조사를 해서 이렇게 책도 발간했더라고요. 그리고 그냥 예전에 오래전에 송산리라든지 무령왕릉이라던지 발굴조사 보고서가 나왔습니다마는 앞서 신발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무슨 물건인지 몰랐는데 다양한 연구 작업들이 조사 연구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지난해에 ’1500년전 백제 무령왕의 장례‘라고 하는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그냥 ’관장이 하자‘, 그리고 연구사가 ’하겠습니다‘ 해서 1년 만에 준비된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그때까지는 기술적으로 부족해서 이걸 보존처리도 못하고 복원도 못하고 이랬던 부분들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연구 성과가 집적이 되면서 새롭게 막 점점 점점 연구성과들도 집적하고 유물에 대한 복원과 정리와 이런 것들이 계속 누적이 되겠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계속 집중이 된 그 성과,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전시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무령왕릉 1500주년에 맞춰서 서거 1500주년에 맞춰서 전시를 했습니다마는 1480년에는 못했냐? 아, 사실 하려고 했으면 못했을 것 같아요. 단순하게 박물관 전시라고 하는 것이 그 전시 하나로 그냥 하겠다라고 결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수십 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들을 집적을 해야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특별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결국은 여기는 잘 안 나옵니다마는 향후 그 주제와 관련된 연구를 활성화는데도 쓰이고요. 그 특별전이 상설전시에도 반영이 될 것이고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교육이나 문화의 행사나 등등의 다른 박물관 사업으로 또 확장이 된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양한 전시와 교육, 공연 프로그램
전시 작업인데요. 가장 최근에 전시가 무령왕의 장례이고요. 그 전에 길거리 전시를 했습니다. 일반 관람객들은 박물관 전시실에 오시면 깨끗하게 정리된, 깨끗한 공간에서 유물을 편하게 보실 수 있는데요. 실제로 이런 이렇게 작업을 합니다. 혹시나 손자분이나 아시는 분 중에 박물관 학예사를 꿈꾸시는 분들이 있다면 꼭 이 말씀 드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백조가 우아하게 떠 있지만 그 발은 어떻게 한다고요? 마찬가지로 요 부분이 백제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면 발에 해당되는 작업들입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힘써야 되는 작업부터 시작해서 연장을 써야 되는 것까지 굉장히 많은 작업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예를 들었던 백제 무령왕의 장례, 영상도 있고 굉장히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농담인데요, 제가 노안이 온지 좀 됐거든요. 그런데 지금 안경을 벗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낚시줄로 가지고 막 묶어야 되는데 줄이 안 보이기 때문에, 예, 박물관 노쇠화가 굉장히 많이 진행이 돼서 낚시줄을 제대로 잡거나 묶을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노안 올 때쯤 되면 현업에서 낚시줄을 묶는 데서 해방이 됐는데, 요즘에는 일이 많아지고 하다 보니까 이제 관장인데도 불구하고 작년에 낚시줄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교육들 중심으로 말씀드리면, 박물관대학을 아마 오신 분들 많을 텐데요, 박물관대학. 해마다 다양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고요. 또 전시를 좀 더 관람객들이 재미있고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큐레이터와의 대화‘라고 하는 교육도 하고, 특별전 기간 중에 주말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프로그램 이런 것들도 진행을 하고 있고요. 방학 기간에 수장고 탐험이라는 주제로 수장고에서 수업하고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코로나 기간에 이런 걸 많이 했던 것 같은데요, 박물관을 못 오니까 학교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또 못 온다고 하니까 직접 체험 도구를 챙겨서 학교로 찾아가서 교육하는 이런 프로그램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사도 지난해 올해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런 콘서트, 뮤지컬, 그다음에 박물관 오는 여기서 노래 부르고 하는 것들을 저는 아까도 사실은 음악하고 이런 걸 좋아합니다만 잘 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듣는 걸 너무 좋아해서. 그런데 아까 전에 앉아서 보니까 주변을 둘러보니까 바람도 불고 조명도 이쁘고 노래도 너무 좋고 환경도 너무 좋아서 막 촉촉하게 젖어드는, 다들 아마 그러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나와서 갑자기 바뀐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만 박물관에서 또 이런 음악, 뮤지컬 이런 것들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좀 더 바람이 있다면 이 무령왕릉 또는 백제문화와 좀 관련을 지어서 하는 음악 공연, 이런 것들이 좀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그냥 단순하게 그냥 김광석 노래 너무 좋긴 하지만 그냥 막 박물관 와서 갑자기 일어나~ 이러면 또 이상해지잖아요. 그래서 좀 어울리는 음악들, 이런 것들도 많이 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다음으로 요런 비보이 공연, 그리고 걷다 보면, 숲속 음악,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이런 답사도 있었고요, 그리고 요런 콘서트 같은 경우,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맞춰 가지고 소년합창단도 와서 공연을 했더라고요. 아, 했었네요. 제가 있을 때였네요. 예, 이런 공연들 이렇게 합니다.
박물관의 뿌리
그럼 뿌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는데 이게 제일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정말 공주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중동 박물관 또는 선화당 박물관을 관람하시던 분 앞에서 제가 이 얘기 드리기 굉장히 좀 부담스럽긴 한데요, 제가 아는 선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제가 보통 수도가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서 이게 웅진백제 또는 사비백제, 한성백제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공주박물관도 보니까 백제하고 똑같이 세 시기가 있었더라고요. 처음에 선화당 시기, 두 번째는 중동에 새로 박물관 지었던 시기, 그리고 웅진동 시기, 이렇게 세 가지였더라구요. 사진을 찾아보니까 선화당에 있었던 당시 모습이고요. 사실 중요한 게 저는 이거 아닐까 싶습니다. 공주 시민의 뜻인 사적 보존이라든지 사적현창회, 이 노력으로 40년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저는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공주를 사랑하시고 공주문화를 사랑하시고 백제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오신 거 아니겠습니까?
이 오래 전 일제 강점기였습니다마는 이 공주지역민들의 이런 문화적 의지가 저는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경주 박물관에 특별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제는 뭐였냐면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혹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가 만들어진 지 몇 년 정도 됐을 것 같습니까? (방청객 : 40년~) 70년 됐습니다. (방청객 : 와~) 1954년, 그때는 6.25전쟁 끝나자마자 바로 어린이박물관학교라는 걸 만들었어요. 1회 졸업생이 아직 살아계시는데요, 사실 그분의 아드님이 국립박물관 학예사입니다. 그리고 경주박물관장이 그 학교 출신입니다. 국립박물관에 성골, 진골과 육두품이 있거든요. (방청객 웃음) 특히 경주 출신들이 그렇습니다. 제가 경상도가 고향이고요. 실제로는 경주에서 태어났는데 영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경주고등학교를 나왔거든요. (방청객 : 우리 아들도~) 그래서 경주고등학교 나오고 박물관에 들어왔는데 지금 현재 경주고등학교 출신이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최다 고등학교입니다. (방청객 : 아~) 예, 이제 한 명이 퇴직을 하셔서 좀 애매해집니다만, 지금 학예사가 두 명이고 관장이 세 명이었어요. 불과 6월 달까지.
그런데 거기에 경주 관장이 경주고등학교 출신이신데 이분이 경주고등학교 나왔다고 하면 제일 먼저 묻는 게 뭐냐 하면, 담임선생님 누구냐 이런 거 아닙니다. 어린이박물관학교 나왔어? 이렇게 물어요. 제가 김해에서 그분과 같이 만났는데 고등학교 후배인 줄 알고 “어린이박물관학교 나왔어?” 그러니까 “저기 못 나왔습니다.”, “가라.” (방청객 웃음) 그래서 경주 안에서도 경주고등학교 안에서도 선생님들 수업시간에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얘기를 엄청 많이 하세요. 거기에 신라문화 동인회 거기 출신들이 박물관장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문화원 원장님도 그 학교 출신이고 거기에 있는 주요 분들이 다 그 학교 출신인 거예요.
그런 문화적인 역사에 대한 인식들을 많이 갖고 있는 도시라는 그게 너무나 사실 부러웠던 부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영천에 어린 시절 사는 입장에서. 그런데 공주에 왔더니 공주도 아, 경주하고, 제가 비교를 단순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아, 이런 걸 보니까 ’아, 정말 공주도 대단한 도시다‘라는 생각을 사실은 하게 된 게 바로 이런 부분들입니다. 관 주도가 아니라 민 주도로 박물관을 만들었다라는 겁니다. 그 40년에 충청감영에 있던 건물 선화당이라고 하는 그곳에 박물관을 개관하고 45년과 46년을 거쳐 정식 개관을 했습니다. 여기에 선화당 시기였던 박물관 전시실의 모습을 제가 또 박물관에서 찾아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이 유물 아직도 박물관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선화당입니다. 오늘날 박물관, 공주박물관 이 사진을 한번 보시면서 아마 조만간 공주박물관 가서 저 전시실 안 보시면 아, 감회가 좀 다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근데 제가 중요한 건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유물, 거기에 꼬리표가 하나 붙어 있어요. 거기다가 유물 번호가, 이름이 뭔지 이런 거예요, 유물 번호가 있죠. 여기서 분(分) 92라고 하는 게 지금 현재 공주박물관 유물 번호 92번입니다. 국립박물관 공주 분관이라고 하는 것에서 시작을 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분 92가 ‘공주 92’ 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고요. 거기에 그때 활동했던 단체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때 그 단체가 이 유물을 어떻게 수집을 해서 여기에 딱지를 붙였나 봐요. 그 뒤에 공주박물관, 희미합니다마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유물에다가 전산 작업을 하기 때문에 내용들 다 들어갑니다. 언제 수집을 했고 이름이 뭐였고 옛날 이름 뭐였고 유물 번호가 뭐였고 다 있는데 사실 저희들은 떼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유물 종이 하나가 그냥 이 유물에 대한 역사뿐만이 아니라 이 공주지역의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다라는 생각에 떼고 제거하지 않고 하고 있는데요. 혹시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유물 검색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뮤지엄’이라고 한글로 그냥 네이버에 치면 이뮤지엄이라고 나오거든요. 거기에 그냥 ‘공주92’ 클릭하면 이 유물이 나올 겁니다. 무령왕릉 유물 보고 싶으면 ‘무령’ 이렇게 치면요, 거기에 5천 몇 백 점의 유물들이 쫙 나옵니다. 사진도 굉장히 크게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에 유물 전시하기 위해서 중동에 박물관을 새롭게 짓는 과정에서 아마 공사 모습들을 찍은 사진을 한번 보여드리고요. 그사이에 아마 75년이 분관에서 공주박물관으로 본격적으로 승격했던 모습, 저도 박물관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박물관에 출장을 갔습니다. 출장을 가서 당시 인제 선배들이, ‘야, 우리 박물관 이사가게 됐어. 부지가 정해졌어.’ 그래서 데리고 갔어요. 저를 막 어디 논을 헤치고 산을 넘어서, 우리 박물관 쪽으로 갈 거야. 그런데 제가 처음 든 생각이 뭐였느냐면 아, 이 박물관 다음에 발령나면 어떡하지? (방청객 웃음) 저기서 어떻게 근무하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진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 뒤로 한참 지나다 보니까 거기 한옥 마을도 생겨지고 아트센터도 생겨지고 하면서 지금은 아, 저쪽으로 간 거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잠깐 기억이 났습니다.
<이정근 관장과 참가자 대화>
중동박물관 개관 행사 때 사진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리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중동에 있었던 박물관 전시실 내부 모습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신축 개관 때 만들었던 도로이고요. 그리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96년이라고 확인이 됐는데요, 중동 박물관 시절의 전시실입니다. 그때 관람권이 남아 있습니다, 93년도. 금액이 110원, 야~ 요즘 110원이면 대체 무엇을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박물관이 무료화 되기 바로 직전 유료화 때 아마 1000원이었나? 하여튼 제 기억에도 그랬던 거 같아요.
중동 박물관 시기의 학술행사 심포지엄이었던 것 같아요. 이 좁은 데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고, 그 당시에 아마 박물관 교육 모습인 것 같습니다. 99년도에 이전신축 기공식이 있었더라고요, 그때 사진이고, 아마 이때부터는 아마 아시는 분들 모습이 아마 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건물을 짓고 있었던 모습입니다. 지금 현재 박물관 사무실, 상설실, 충청권역 수장고가 여기 있는데 이 사진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제 새 박물관의 수장고로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는 모습이고요. 그리고 웅진동에 새롭게 박물관 만들고 난 뒤 첫 번째 전시실 사진입니다. 이 작은 사진은 현재 똑같은 부분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예, 아까 전에 제가 웅진동 시기에 목관이 어떻게 있었는가 기억나시나요? 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렇게 되어 있더라구요. 그냥 아마 목관의 크기로 맞춰서 색깔에 까만 옻칠을 하고 그냥 형태만 잡아서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가면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좀 더 깨끗하게 보이긴 합니다만 이거는 실제 유물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 나무가 다 흩어져 있는, 부재들이 다 흩어져 있는 상태로 거의 50년간 흩어져 있었습니다. 수장고에 그냥 보관만 되어 있었죠. 그것이 5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해서 위치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당시에 나무 그대로. 물론 외형은 많이 삭았고 없어진 부분이 존재합니다만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도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이걸 좋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단연코 아마 이거를 선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50년이 걸렸다. 그냥 쉽게, 단순하게 그냥 바꾸지 뭐, 우리가 컴퓨터나 노트북이나 냉장고 사는 거하고 좀 다른 개념입니다.
박물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부분은 염두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뿌리까지 얘기 드린다고 했는데요. 사실은 박물관이 식물이라고 하면 뿌리만 있다고 해서, 수경 재배 하더라도 물도 필요하잖아요. 영양분도 필요하고, 그냥 뿌리,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도 필요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영양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와 관련된 그림을 제가 못 그리지만 이렇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박물관이 식물이라면 꽃은 전시이고 줄기와 잎은 교육, 행사, 보존처리, 유물 관리, 그리고 뿌리라고 하는 것들은 지난 박물관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주라고 하는 이 지역이겠고 그리고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햇빛도 필요하고 물도 필요하고 뭐 칼슘, 인, 이런 거 질소와 같은 이런 영양분도 필요한데 그것들은 결국은 지역민들의 박물관에 대한 관심과 사랑, 오늘 이 공산성에 오신 그 이유가 저는 이 박물관이 지난 84년 동안 공주에서 뿌리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그 배경이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백제와 관련된 이야기, 유물과 관련 얘기 거의 안 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저는 이게 아닌가 싶습니다. 백제에 대한, 지역에 대한, 박물관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것이 아마 중요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부탁을 좀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방청객 박수)

맥가이버 칼, 동의하십니까? 핸드폰이 맥가이버 칼이다, 만능 도구다. 그걸로 사진도 찍고 통화도 하고, 금융도 하고, 물건도 사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고, 이것 없으면 다시 집에 돌아가야 되잖아요, 이거 두고 집에 출근하면. 현대인의 생존 필수품입니다. 이 두 개가 왠지 이쪽 끝에 있고 이쪽 끝에 있는 것 같지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이름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원한테, 같이 한 손에 주먹 도끼를, 한 손에 핸드폰 쥐고 한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직원을 사진 찍었어요. 많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고 이 핸드 액스, 손도끼라고 하는 주먹 도끼라 하는 것들이 수십, 수백만 년 전에 인류가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다 핸드폰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주먹 도끼를, 어떤 사람한테 얘기했더니 아, 그거 박물관에 있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 인류가 만약에 이 헨드 액스, 주먹 도끼라는 걸 몰랐다면 오늘날 우리 손에는 핸드폰이 아닌 이쑤시개도 없었을 것 같아요. 그 핸드 액스를 들고 있었던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고 그 과정이 엄청나게 많은 오랜 기간 동안의 변화를 거쳐서 우리 손에 지금 핸드폰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들고 박물관에 오신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물관은 지나간 인류의 흔적을 모은 곳이지만, 현재, 그리고 과거, 미래가 다 함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박물관은 아마 타임머신이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박물관, 가까운 박물관에 오셔서 즐거운 시간 여행해주시면 감사하겠다라는 말씀으로 오늘 이야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태묵 소장) 박물관이 우리가 왜 필요한가? 우리의 뿌리가 왜 필요한가? 우리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그거를 그 꽃과 줄기, 뿌리로 그렇게 비유를 해서 그렇게 얘기를 해주시니까 아주 비유가 너무 굉장히 색다르고 유효적절하게 해서 저기 어른들부터 저기 밑에 유치원 애기들 까지도 이렇게 한눈에 딱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오늘 아주 좋은 시간 감사합니다. (방청객 박수) 이제 앞으로 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볼 때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볼 것 같습니다.
(방청객) 지금까지 박물관에서 한 특별전에 대해서 굉장히 감명깊게 보고 그랬는데 다음 특별전 좀 소개해 주세요.
이번에는 주제가 ’백제의 용‘입니다, ’용‘. 사실은 박물관, 13개의 지방에 있는 박물관, 당연히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보니까 다양한 우리나라 어떤 역사, 어떤 시대의 역사이든 문화이든 다 다루는데요. 각 지방에 있는 박물관들은 약간 브랜드화 또는 특성화라는 이름으로 약간 특화를 시켰습니다. 당연히 공주는 웅진 백제, 특히나 그중에서도 무령왕릉 중심이고요, 당연히 부여는 사비 백제 중심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의 특별전이 있고 특화된 부분에 맞춰서 전시를 많이 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물론 그전에 계룡산이라든지 등등 웅진 백제와 관련 없는 부분도 하긴 했습니다마는 웬만하면 웅진 백제와 관련 특별전을 하려고 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이제 용과 관련된 내용들이 사실은 백제의 용과 관련된 자료들이 한 번도 정리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전에 했던 계기는 이 용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 뭔가를 보여드리겠다, 이런 이유보다는 여기에 대한 관심을 한번 돌려보겠다. 왜냐하면 전시라고 하는 것이 이 자료를 한번 모아서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역할도 하거든요. 그래서 백제의 용과 관련해서 한번 시민들도 그렇고 연구자들도 그렇고 좀 고민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약간 이런 의미가 조금 반영되어서 백제의 용과 관련된 자료를 모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방청객) 백제의 용이~
예. 그래서 용 전시가 용이하지 않은데요. (방청객 웃음) 직원들이 많은 시민들이 그래도 전시를 보시고 굉장히 만족해 하시는 전시가 될 수 있도록 용 쓰고 있습니다. (방청객 웃음) 사실 이거를 시장님 계시는 계룡회에 가서 기관장님들 있는 데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는데요, 굉장히 엄숙하게 음~ 고개를 이렇게 하셔서 다시는 이런 말 안 해야겠다 했는데 오늘은 적절하게 써먹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어주셔서.
(방청객) 박물관 유물이 이제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은데, 옛날에 그 등록 안 된 거 뭐 있잖아요. 옛날에 가지고 있던 거, 그때는 등록 안 된 것이 굉장히 많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등록이 아직도 안 된 유물, 예를 들면 송산리 고분군에서 옛날에 나와서 등록 안 된 유물들, 그런 등록 안 된 유물이 박물관에 지금도 등록해야 할 유물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필요한 것은 다 지금 등록된 상태인지 그것이 궁금해요.
굉장히 국가 기밀에 해당되는, (방청객 웃음) 왜냐하면 이게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송산리와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자료들은 사실 공주 없을 가능성이 있고요. 그 무령왕릉도 받아온 겁니다, 중요품들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가지고 있다가 내려왔고요. 그다음에 아까 전에 제가 송산리 관련된 일제강점기 자료, 재보고한다고 보고서 내는 사진을 보여드렸을 텐데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그냥 막 헤집어 놓은 거를 어디다 보관했나면 서울에 보관 했어요. 상자에 그냥 막 담아 놓은 거예요. 세척도 안하고, 그냥 꼬리표 하나만 달고, 심지어 꼬리표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단순히 그냥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그동안 전쟁이 있었잖아요. 짐을 싸서 부산까지 내려갔죠. 다시 또 올라왔죠. 박물관도 몇 번을 옮겨다녔잖아요. 덕수궁에도 있었지, 민속박물관 자리에도 있었지, 중앙청 청사 조선총독부 건물에도 있었지, 그리고 이사를 몇 번이나 했죠. 그러니까 이거 정리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는 거예요. 당장 급한 것부터 하다 보니까 옛날 거를 정리를 못했던 게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것. 한 10년 정도 전에부터 이걸 다 털어 내자, 라고 해서 그걸 어떻게. 서울에서 너무나 부담이 되니까 지방에 있는 박물관, 예를 들어서 경주 쪽의 거는 경주박물관 보내고 대구 쪽의 거는 대구박물관 보내고, 공주 거는 여기 보내고, 부여 거는 부여박물관에 보내고 해서 보고서도 쓰고 새로 정리하면서 보고서를 냈고요. 그러면서 등록을 새로 다 했겠죠. 그리고 이제 송산리도 그렇게 다 정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저희 쪽에 유물이 조금 있어요. 뭐냐 하면 박물관에 계신 분들이 특징이 뭐냐면 절대로 버리지 않아요. 무조건 가져다가 어디다가 꼭꼭 숨겨놓아 놓으시거든요. 예를 들어 수촌리 근처를 지나시다가 유물을 주워 가지고 그걸 메모를 해서 봉투에 옛날에 편지봉투 같은 데에 넣어 가지고 보관되어 있고, 이런 것들이 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냥 단순하게 그냥 등록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마 지금 현재 어떤 발굴이 있었고 그다음에 그때 메모가 뭐였고 이런 것들을 다 검증을 하고 확인을 해서 등록을 해야 되다 보니까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그것도 지금 현재 시작하고 있는 단계다. 그래서 조만간 아마 그 내용들은 아마 다 공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방청객) 왕비 관장식이 중박(중앙박물관) 소속이에요, 공주박물관 소속이에요?
무령왕릉 출토품은 전부 공주 번호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주박물관에서 원래 가장 큰 사업 중의 하나가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업은 아닌데요. 무령왕릉 유물을 새 번호로 부여합니다. 예전에는 공주 몇 번에서 쭉 시작했겠죠. 원래 공주 분관에서 시작된 유물을 인계받아서 가지고 있다가 공주 무령왕릉 유물들이 공주 번호를 달고 1030번부터 시작해서 예를 들어 이렇게 있었겠죠. 그런데 이게 무령왕릉 것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섞여 있잖아요, 번호가. 그러니까 헷갈리는 부분도 있고. 또 두 번째는 뭐냐면 제가 수십 년간 계속 보존처리를 하면서 예전에는 한 개 유물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딴 유물을 강제로 붙여놓은 거야, 몰라 가지고. 얘를 분리해야 했는데 번호가 두 개 생겨야 되는데 이미 번호는 여유가 없는 거예요. 이런 문제가 사실은 있어 가지고 이걸 별도로 무령 번호로 따로 빼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공주 몇 번의 번호를 갖고 있던 물건들을 다 빼 가지고 새로 다 정리하고 수량을 다시 새로 다 정리를 해서, 그래서 지금 제가 정확히 기억 못 하겠습니다만 5200, 5300여 점까지 갔는데요.
그전에는 그보다 숫자가 훨씬 낮았습니다. 새로 정리하면서 올 6월 달 또는 7월 달 정도, 아, 지금 7월 달이죠, 7월 달 말 또는 8월 달까지 정리를 할 게 있는데요. 새로운 유물이 추가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사업입니다.
(방청객 : 백제의 유물들이 중박에서 전시~)
중박(중앙박물관) 소속이 아니고 지금 현재 중박에 있다고 되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소유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현 보관처, 현재 볼 수 있는 데를 지정하기 때문에 중앙박물관 과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불비상,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건 사실인데요. 지금 각 박물관 별 특화 얘기를 많이 드렸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웅진백제중심의 박물관을 사실은 운영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아마도 그게 조금 더 필요한 기관에 저희들이 좀 빌려준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고요. 좋게 얘기하시면 좋은 것들이 뭐냐면 우리나라 가장 보험 평가액이 높은 유물이 뭘까요?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알지만 말씀드릴 수 없지만, 금동 반가사유상? 아니면 부여에 있는 백제 향로, 대향로? 이런 것들이겠죠. 근데 이제 어떤 분들은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이 지역을 절대로 떠나면 안 된다.‘ 저는 사실은 그 부분도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백제가 어떤 나라였냐, (방청객 웃음) 백제가 어떤 나라였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저는 백제 얘기할 때에 그 대외교류 이런 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잖아요. 그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백제를 가장 많이 알릴 수 있는 데가 어디일까요? 저는 서울 중앙박물관이라고 생각되거든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오는 박물관입니다, 관람객이, 외국인들도. 거기에다가 이 무령왕릉의 유물의 대표적인 유물들, 왕비의 관장식이 가 있는데요, 그걸 보여주면서 세계인들에게 백제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공주에는 이 서울에 오는 관람객의 10분의 1 정도 보거든요. 그래서 공주에도 있어야 되지만 그런데도 좀 가야 된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방청객) 한옥의 모형 형태가 어디서 그런 모형이 나왔을까 하는 게 궁금하고, 절의 곡선이라든가, 혹시 그런 데 연구가 된 게 있는가 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 소개를 먼저 안 드렸는데요, 사실은 제가 요즘에 공주의 남자라고 얘기하고 다니고 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 가야의 아들이라고 했거든요. (방청객 웃음) 죄송합니다. 지난해까지. 딱 1년 전에는 가야의 아들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그전에는 골볼의 자손이라고, 아버님이 영천에 사시는데요 그게 예전에 소국이 골볼국(骨伐國)이었습니다. 그래서 골볼의 자손이라고 얘기하다가 가야의 아들이 됐다가 이제 공주의 남자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있다고 모든 걸 다 알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고학 쪽이다 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명쾌한 답을 못 드릴 것 같습니다.
(방청객 박수)

<공주대 음악교육과 혼이 공연하다>
백제의 옛 왕성, 동아시아 교류를 이루다
공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천영란
세계유산의 도시, 공주 하면 ‘백제의 왕도, 백제의 옛 수도’가 떠오르시죠!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왕도(수도)로서 백제의 5대 왕이 64년간 백제를 다스렸던 중심지였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주의 공산성은 약 1500년 전 백제의 왕권을 수호했던 왕성으로 시작합니다. 북쪽으로 금강이 띠를 두르고 있고 110m의 공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을 걷다 보면 오랫동안 이곳이 왜 천혜의 요새로 불렸는지 알 수 있어요. 성안에서는 격조 있고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발굴되어 그 옛날 백제 역사를 그려볼 수 있답니다.
백제가 이곳에서 국력을 회복하고 난 후에 백제의 수도는 부여(사비)로 옮겨졌는데요, 이후에도 공산성은 오랫동안 방어성으로 활용되었던 것, 알고 계셨나요!. 백제의 왕성에서 시작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설을 새로이 하며 약 1400년간 꾸준히 활용되었던 공산성, 국가적인 큰 사건이 있을 때 이곳을 찾았던 왕들이 있었는데요,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이 백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산성을 찾았고, 조선시대 인조도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을 찾았답니다.

<천영란 해설사 이야기 들으며 성곽을 걷다>
북쪽의 누각, 공북루는 금강과 바로 접하고 있는데요, 백제는 이 금강을 통해 동아시아로 뻗어나가며 문화교류의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백제의 옛 왕성 공산성,
이곳에서 국력을 회복하고, 동아시아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다’
공산성 달밤 프로그램에서 해설사와 함께 성곽을 밟으며 세계유산으로서 공산성의 가치와 의미를 느껴보세요. 공북루에서는 옛 왕성에 운치를 더해 줄 작은음악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행사는 세계유산 활용 프로그램으로 국가유산청과 공주시, 충청남도가 지원하고 (사)한국국가유산안전연구소가 진행한다.
글쓴이 : (사)한국국가유산안전연구소 소장 이태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