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
| 이태호 교수는 전남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명지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교수는 고구려 후기 벽화의 유려하고 우아한 감수성이 백제 미의식과 연관되었음을 확인했다. ‘나는 일찍부터 고구려 후기 사신도의 배치나 연화문 같은 도상이 백제의 영향이었음을 주장했었다. 공주의 송산리6호분 사신도나 무령왕릉 출토 금관장식과 무덤내벽을 쌓은 벽돌 문양에 그 연원이 있음을 진파리 1, 4호분 벽화문양을 그려보고 나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근현대회화까지 한국회화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가져왔고 최근에는 초상화, 풍속화, 진경산수화 등 조선후기 회화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구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을 지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우리시대 우리 미술’, ‘풍속화’,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조선미술사 기행’ 등이 있다. |
청전 이상범 선생님은 여기 석송, 정안 석송에서 태어나셨고요, 거기서 10살 때까지 어린 시절을 공주 석송, 정안천을 끼고 들과 산을 낮은 구릉의 산을 끼고 살았던 그 10년 어렸을 때의 자연 체험이 청전 평생 예술의 근간이 된 거죠. 그죠?
그래서 이 공주가 사실은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어떤 일인지 청전 이상범 선생님은 엄마 따라서 형제들하고 상경한 뒤로 고향을 한 번도 안 오셨대요.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겠죠, 안 오셨는데 그 바람에 공주에서도 청전 이상범을 잊었지요,
청전 이상범의 생애 속에 한 번은 항일 의지를 보였던 그 행적이 있고 또 한 번은 친일 행적이 또 있어요. 살아왔던 역사 속에 있었던 일이다,
전주이씨 가문으로 공주 정안 석송에서 태어난 이상범 화백
키가 아주 작아요. 원래 전주 이씨 정종의 후손, 정종의 아들 중의 하나인 덕천군파로 공주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있는 그런 계파인데요. 무관, 청전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때부터는 무관 집안 출신인데 청전 선생님은 키가 작아서, 만약에 조선시대가 유지됐으면 무과에 급제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키가 작고, 지금 패션을 보셔서 알지만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으셨어요. 그러니까 한복과 양복을 함께 즐기신 분이라고 봐야죠. 저만 해도 한복을 거의 안 입잖아요, 그죠? 안 입으면서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이상하죠, 우리 이전 할아버지 세대들의 생각과 예술의 지향점이 이 패션에 그냥 나타난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지금 손에 뭘 들고 있어요? 담배 엄청나게 태우셨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그림 가르치려고 옆에만 와도 이 담배 냄새 때문에 도망갔다, 그럴 정도로 담배를 많이 폈고, 그다음에 대주가였어요, 엄청 술을 많이 드셔서. 어느 정도 드셨다면 명동이나 남대문에서 술을 12시까지 드시고 12시 막차 평양행 기차를 타고 기차 안에서도 계속 드시고요. 평양에 가면 뭐가 유명해요? (냉면~) 예? 냉면? 술 드시는 분이 웬 냉면이에요? (방청객 웃음) 기생집. 그래서 새벽 기생집에서 또 드시고, 또 돌아오시는 길에 새벽에 새벽 평양에서 서울 오는 경성 오는 기차를 타고 또 드시고, 경성역에 8시쯤 내리셔, 목욕하고 출근하는. (잠은 언제 자요? ) 예? 그러게요. 근무시간에 주무시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대주가였습니다.
하여튼 청전 이상범은 첫 부인하고 사별했고, 그 다음에 재취. 삼취, 부인을 셋 얻었지요. 그리고 큰아들이, 건영이 월북을 했는데요, 그 아들 넷을 둘 줄 알았는지 아들 이름을 건 자를 붙여서 영웅호걸, 그래서 건영, 건웅, 건호, 권걸 이렇게 넷을 두었습니다. 큰아들 하고 막내인 넷째 아들하고 화가였고요. 큰아들은 월북했고 넷째아들은 상명여대에서 동양학과 교수를 하시다가 정년하셨고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개인전을 할 수 없었다, 그림 그리는 대로 팔려 나가서
이상범 화백은 이 동아일보 손기정 선수 일장기를 지우는 사건에 연루돼서 고초를 치렀고요, 그 다음에 조선인 징병제가 1943년 8월 1일 시행되자 거기에 대한 찬양의 시와 글, 그림에 동원이 됐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림이 천편일률이라고 하는 너무 평생 동일한 형식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함께 야치(野致,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흥취)의 풍경, 향토애를 담았다,
그와 동시에 해방 후 미술작품이 시장에서 역할을 하면서 수화 김환기(1913-1974,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적 작가)의 ‘우주’라고 하는 점화가 130억에 팔렸다~ 이런 게 나오잖아요? 그럴 때 1950년, 60년, 70년대에는 수화 김환기 같은 그런 사람의 역할보다 청전 이상범이 큰 역할을 했어요.
청전 이상범은 평생 개인전을 한번도 못했어요. 왜? 개인전을 하려면 그림을 모아야 되는데 그림을 모을 수가 없어요. 왜? (다 팔렸어요~) 네, 화판에다가 종이를 붙이면 누군가가 와서 ‘아, 선생님 이건 제 겁니다’ 하고 봉투를 놓고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작업실에 그림이 안 쌓이니까 개인전을 할 수가 없죠. 최고의 인기 작가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아무튼 부드럽고 차분하고 자상하고 다감한, 그리고 소탈하고 천정무구하고 내성적인 그런 예술가의 진면목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런 오점이 하나 딱 있습니다. 그게 우리 또 역사라고 볼 수 있죠.
이상범의 고향 석송동천에서 어린시절의 풍경
공주 정안 천변에 나락이 익어가는 풍경 사진입니다. 여기를 2010년대부터 조사를 다니고 찾아다녔는데, 그때 그 풀섶(풀숲의 방언), 밤나무 숲을 뒤져 가지고 그 번지를 찍고 그랬는데요, 석송의 입구, 이 석송마을은 충청남도 지역의 3·1운동, 3월 1일에 3·1운동을 주민들이 일으켰고 거기서 한 분이 돌아가셨고 한 분이 독립운동을 이끈 그런 마을로도 유명하죠. 바로 석송의 ‘안말’이라는 마을인데 지금 이 아래에 파란지붕집이 독립운동가 집이었고요, 그 비탈을 살짝 올라가서 왼편, 이 언덕이 청전 이상범의 생가, 터만 남아 있었죠. 제 기억에 11년, 이때쯤 되는데, 그래서 혹시 청전 이상범 그 가족의 호적이 정안면에 남아 있을 수 있겠다 그래가지고 호적 관리하는 구급 공무원 아가씨하고 하루 종일 싸워가지고 다음날 가서 호적 전체를 다 뒤져서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는데 그 걸 다 빼 가지고 서울로 가셨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정안에는 안 남아 있었습니다. 2017년에 다시 갔더니 누군가가 집을 지었는데 아마 세컨드하우스 같았어요, 이 앞마을에 청전 이상범의 아버지 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무성산을 배경으로 하고 천태산을 앞산으로 해서 형성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10년을 살았고, 어린 10년 동안에 눈에 익힌 이 풍경이 청전 이상범의 그림, 청전 이상범의 그림은 이 낮은 야산, 낮은 구릉의 야산과 정안천과 같은 물이 흐르는 그런 풍경을 거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천편일률로 그렸는데, 이런 풍경이 바로 어렸을 때 형성된 자연이 가져 온 결과지요.
그 정안천의 석송마을 왼편 벼랑에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하는 바위 글씨가 있고, 여기는 인조가 여기 공주를 가시다가 여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머물렀던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 바위글씨를 남겼다 해서 기념하는 공간이죠. 그 앞마을이 전부 전주 이씨 왕손들이어서 그랬는지 여기에 기념비를 세우고 정자를 복원하고, 그런 왕실 손의 역할들을 해놓은 것 같습니다. 아래 그림은 제가 그린 겁니다. (와~) 작년에 이 책을 내기 위해서 제가 특별히 가서 스케치해온 그림, 이태호 그림, 써 있죠? (방청객 무반응) 별로인 가 봐요~ (방청객 웃음과 박수) 감사합니다.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인조의 글씨로 전하는데 어필은 아닌 것 같고요, 어필이면 여기에 틀림없이 어필이라고 하는 표시를 하게 되는데요, 아무튼 그 기념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아요.
청전 이상범의 가계
청전 이상범은 그동안 우리 미술사 연구자나 미술비평 하는 분들이 늘 청전 이상범 선생이나 그 제자들의 얘기가 어려서 10살까지 너무 고생을 해가지고 너무 가난에서 어머니가 ‘서울 가~’ 해가지고 서울로 이사했다, 그래서 이렇게 너무너무 힘들게 어렵게 살다가 화가가 됐다, 이게 정설인데, 족보를 뒤져보니까, 가난할 수 없는 집안이에요.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한 이승원, 지금으로 하면 훈련대장, 그다음에 전주중군, 전주군 총사령관, 공주사령관 이렇게 해서 상당히 높은 벼슬, 50 갓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상당히 높은 벼
슬을 했어요. 무과 무관이긴 했지만 왕실손이라고 하는 거에 대한, 뭐랄까, 프리미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당히 부유했을 것 같고 그다음에 가난해서 서울로 갔다라는 건 맞지 않고 서울에 집이 있으니까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서울에 훈련대장을 하실 때 지금 평창동 쪽에 군부대가 있었으니까
그 근처 아래 홍제동이나 이런데 집이 있었던 거 같고, 처음에 그리로 갔다가 도성 안으로,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양상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승원의 아들 상덕, 그다음에 상덕과 상윤, 이렇게 두 사람의 아들이 보이는데, 한 사람은 본처의 아들이고 한 사람은 서출이에요. 그런데 이상범은 없어요. 이상범은 이 족보에 없어요. 이 족보는 뭐냐면 왕실 족보, 선원보라고 해서 왕실 손들을 전부 족보로 만들어 놓은 그런 데는 없습니다. 이게 1920년대에 만들어진 건데요, 없고 나중에 1990년대에 만든 족보에 등장해요. 그래서 이 본처의 상덕, 본처의 큰아들, 그리고 손자가 또 있었는데요, 이 집안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잘 소통은 안 돼 있는 것 같고, 지금 저도 아버지의 큰 장남 장손에 대해서는 확인을 못해봤습니다.
그 아버지가 평해군수 시절에 불과 두세 달밖에 근무를 안 했는데 공덕비가 세워져 있어요. 역시 왕실 손이어서 갖는 그런 조치죠. 평해 군민들이 군수 잘했다고 칭찬하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죠. 요기 성곽 올라오다보면 죽 비가 서 있죠. 혹시 우리 전 시장님 공덕비 안 세웠어요? (방청객 웃음) 그 다음에 칠원현감, 칠원현감을 지냈고, 여기는 경상남도 함안이에요. 거기의 향교 풍경인데 이 향교를 이승원, 이상범의 아버지가 복원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념으로 찍었는데, 사진을. 이렇게 지방관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다음에 전주중군(全州中軍)이나 공주 사령관이나 서울 훈련원사령관을 지낸 그런 흔적들은 남아 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지방관, 지방수령을 지낸 무관이었으면 상당히 돈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들 영화나 이런데 보시죠. 고을현감, 수령을 가면, 지방으로, 특히 공주나 이런 데를 오면 상당히 부를 축적해서 간다고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 영화에서 보셨지만 수령으로 가자마자 하는 일이 뭐예요? 주민들, 특히 부자들 모아놓고 무릎을 꿇리고 첫마디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그죠?
세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
근데 90년대 족보에 드디어 여기에는 실려 있네요. 승 자 원 자의 상덕, 큰 아들이 있고요. 그 다음에 이상범의 엄마는 세 번째 부인인 거죠, 이상범을 낳았고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상만, 상무, 상범 이렇게 해서 세 아들을 낳았고 세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죠. 그 어머니는 김해 김 씨였고 그 외할아버지의 교지(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씀), 할아버지도 무관을 했고 상당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첩의 역할보다는 두 번째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마침 그 외할아버지, 이상범의 외할아버지를 이름자를 가지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교지가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그 책에 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이사를 와서 1937년 누하동, 홍제동 쪽에 살았다고 그래요. 홍제동은 평창동 쪽으로 길이 연결이 되어있고 아마 그쪽에 집터가 있었던 것 같고요. 누하동 청연산방이라고 하는 이 지금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하고 배화여자여자대학교 바로 아래, 운동장 아래에 이 기와집에 청전 이상범이 살았고 작업실을 마련했던 장소이죠. 1937년에 여기 들어서게 된 거죠. 배화여고는 뭐로 유명한지 아세요? 잘 모르세요? 박정희 대통령 두 번째 부인, 육영수 여사가 여기 졸업해가지고 이 학교가 도성 안에서 큰 위치를 갖게 됐죠. 그 다음에 저 뒤에 뭐가 보여요? 인왕산입니다. 인왕산, 서울의 도성을 구축하는데 제일 중요한 산이고 잘생긴 산이고, 이렇게 잘생긴 산 아래에 사셨는데, 청전 이상범 선생님 스케치북을 다 뒤져도 인왕산 그림이 없어요. 그래서 이 할배는 왜 그랬지? 이런 의구심도 갖기도 했었습니다.
서울 풍경은 없고 공주의 풍경만 있는 그림
청전 이상범 선생은 내 눈 앞에 있는 풍경을 그리기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산을 그렸는데, 그 머릿속에 있는 산은 다 공주의 산이었어요. 그죠? 공주의 들과 공주의 시내와 공주의 산, 언덕을 그렸던 거죠.
그 기억으로 이 잘생긴 인왕산이 자기 예술 세계로 당겨 내는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스케치는 좀 있어요. 그러나 그림으로 그린 일이 없네요. 그러니까 그 누하동 길 골목에 이 안쪽에 이상범의 살림집 공간이고요, 왼쪽이 작업실, 그리고 지금 요 문이 하나인데 여기가 건걸, 막내아들의 살림집과 작업실이 있었고 또 막내는 여기서 구태여 작업하지 않아도 대학에 작업실이 있었기 때문에 절반 있었고. 재미있는 거는
맞은 편 집이 천경자 집이었어요.
<공주 정안 석송정과 청전 그림>
(어~) 해방 직후에 홍익대학에서 청전 이상범 선생이 동양학과 학과장을 주임을 하시고 그때 미술대학을 운영했던 사람이 윤효중이라는 조각가하고 김한기가 그 역할을 했는데, 김한기 선생이 고흥 출신이고 광주에 있는 천경자 선생을 채색화가로 학생들을 위해서, 청전 이상범이 수묵화를 가르친데 비해서 천경자 선생이 채색화를 가르치도록 이렇게 배려를 해서 교수로 초빙을 하게 되죠.
처음에 왔을 때에는 두 분이 사이가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 앞집 구해놓을 테니까 올라와~ 그래가지고 오셨는데 둘이 이렇게 앞뒤 집에 살면서 사이가? (하하하~) 좋았던 사이가 나빠진 것 같아요.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천경자 반, 난 채색화할 거야~ 그러면 천경자 선생 밑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청전 이상범 선생이 ‘어, 저놈 봐라~’ 그러고, 만약에 저놈이 채색화를 해야 될 놈인데 청전 이상범 선생한테 가는 학생을 또 천경자 선생은 꼭 D를 줬대요. (방청객 웃음)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청전 이상범 집안이 큰 것은 상무(작은 형), 황해도, 평안도에 이 광산을 해서 대박 났죠.
그 당시 노다지 한다고 그랬어요. 노다지, 노터치, 이렇게 이제 우리말이 됐다는 거죠. 노다지 한 형의 광산을 청전 이상범이 가서 1937년에 스케치한 거고 이 상무의 재산이 지금 서울에 지금 종로구청 근처에 아흔아홉 칸 집을 질 정도로 큰 부자가 됐었죠.
그런데 이게 분단이 되니까 북한에 있는 광산 재산을 다~ 다 놓고 내려온 거죠. 그 스트레스가 둘째 형한테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이제 어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막내인 이상범에게 작업실을 지어주고 누하동에 집 사주고 했던 형입니다.
그래서 이 집안을 크게 일으켰고 그러면 맨 큰형은 뭐 했나 그랬더니 상당히 풍류객이었대요. ‘조선시대 무관’ 하면 우리가 ‘무관’ 하면 느낌이 뭐예요? 싸움꾼이잖아요, 그죠? 싸움 잘하는 사람. 대개 조선시대 무관 그러면 글씨 잘 쓰고 시도 잘하고 이런 풍류객들이 많았는데 이 집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가가 나온 거죠. 청전 이상범이 1920년 창덕궁 대조전 벽화(창덕궁 대조전 : 국왕과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연조(燕朝)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건물), 20대 초반에 창덕궁에 대조전 벽화를 제작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천재로 일찍 발탁이 된 거죠. 발탁이 된 거예요. 그래서 조선시대의 궁중채색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걸 보여줍니다.
이 어려운 조국 땅을 그리면서 민족정신을 다짐하는 ‘동연사’ 결성
무릉도원도고요, 채색화로 푸른색, 청록산수라고 하죠, 푸른색 바위산과 숲을 그린. 그리고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어부의 모습이고, 복사꽃이 핀 그런 풍경을 그린 무릉도원경을 그린 거죠.
이게 1920년대 유행한 소재이기도 해요. 1920년대 그러면 우리가 일제 강점기죠. 일본의 무단통치를 받는 상황에서 화가, 그리고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들은 그냥 무릉도원, 무릉도원경이었어요, 그죠?
그런 현실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게 궁궐의 그림으로 시작해서 이런 그림들이 당시 돈 많은 사람들이 주문하는 그림이기도 했어요. 바로 이러한 궁중화의 형식은 누구한테 배웠냐면 안중식에게 배워요.
안중식은 조선말기 유명한 화원이었던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의 제자예요.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인데, 바로 이 안중식은 서화협회, 서화미술회를 1911년에 창설해서 조선시대 도화서(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던 관청)가 역할을 했던, 화원을 배출 했던 미술대학의 기능을 바로 서화미술회가 하게 되죠. 그때 교사가 안중식, 조석진, 이런 조선말기의 화원 화가와 문인화가였어요.
그런데 그 중에 특히 안중식은 호가 심전이에요. 마음 심 자에 밭 전 자인데 바로 그 두 제자, 하나는 이상범에게 밭 전 자를 주고 그다음에 노수현이라는 청전하고 같이 서화미술회에 다녔던 친구에게 심 자를 줬어요. 그러니까 스승이 제자한테 수제자라고 생각했을 때 내 호의 글씨 하나를 하나씩 떼 준거야.
아무튼 근대적 미술학교를 다닌 거죠. 그러니까 청전 이상범은 그 당시 보성고보, 전문대학, 이런 데를 다 다녔는데 청정 이상범만 도화서 후신인 서화미술회에 학생으로 들어가서 서과(書科) 2년, 화과(畵科) 2년 해서 졸업을 하고, 안중식에게 이런 채색화 전통을, 궁중 채색화 전통을 그대로 배운 거죠. 그러면서 청전 이상범은 상당히 술을 잘 하고 약간 수줍고 내성적이긴 하지만, 뭘 잘해?
사람들을 모으는 걸 잘 하게 되죠. 그래서 술꾼 네 사람을 불러서 ‘야, 우리 이런 걸 조직하자. 동연사, 함께 연구하고 공부하자’ 라고 하는 동연사를 만들어서 청전 이상범, 묵로 이용우,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이렇게 네 사람이 모의를 해요.
우리 지금 현재 일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 우리도 우리 땅을 그리면서 조선시대 겸제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가 그 위치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지금 이 어려운 조국의 땅을 그리면서 우리도 큰 역할을 하자 이런 모임을 가졌던 것 같은데요. 또 술로 모이면 또 뭘로 깨져? 술로 깨져요. 그래서 전시회를 한 번도 못했대요. 아마 술만 드시고 말았던 것 같고, 심산 노수현하고 청전 이상범, 아까 심산 심 자하고 청전 전 자하고 했던 안중식의 두 무릎 제자만 둘이서 전시를 2인전을 하고 말았던 것 같아요.
1940년대 일본 화풍에서 가장 개성적인 화풍을 구축
여기는 전부 전통적인 형식을 수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때 이런 화가들의 민족의식, 일제강점기가 10년을 지나면서 우리도 우리형식을 일본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도 우리형식을 갖자 이런 생각들을 가질 때 우리 역사책에 뭐가 나와요? 1919년 3·1운동, 3·1운동이 일어나죠.
바로 그게 그 중요한 시점이 되는데, 이런 상태에서 1922년에 총독부는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미술전람회’, 선전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화가들을 공모전, 화가들이 공모전에 출품해서 상을 받는 그런 형태를 만들어요. 지금도 충청남도전, 그죠? 그다음에 국전, 이런 게 이걸 계승한 거죠.
아무튼 그런 속에서 청전 이상범의 그림이 1922년에 안중식 궁중 조선시대 회화의 형식을 계승했던 청전 이상범이 바뀌어요. 그죠? 22년 그림에서 24년 그림으로 가면 확 바뀌어~ 수직구도에서 수평구도로 바뀌고, 그 다음에 그 안중식 풍의 전통 궁중화법에서 일본 화법으로 바뀌어요.
이게 일본 남화풍, 그 전형이 이런 형식입니다. 그 왼쪽에 안중식에게 배웠던 이런 전통적인 형식에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한 해 한 해 출품하면서 이제 선전에 내니까, 선전에 공모전에 출품하니깐 거기서 출품하는 목적은 뭐야? 상을 받아야죠. 입상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뭘 받아야 돼요? 특선도 받아야 되고 대상도 받아야 되고 총독상도 받아야 되고, 이런 욕심이 생기게 되죠.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다 누구야? 일본인들이야~
그러니까 일본인 취향에 맞는 형식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게 일본 근대 남화풍이고 멀리 보면 뿌~옇게, 산이 멀리 갈수록 뿌옇게 되고 이걸 일본 근대 남화의 몽롱체라고 해요,
몽롱체(朦朧體, 풍경을 묘사할 때 선을 사용하지 않는 양식). 그러니까 그런 영향을 받고 서양화식 원근법을 이렇게 잘 적용해서 그림을 그리게 되죠. 이게 대작들, 대형 병풍, 대형 산세. 재미있는 것은 ‘잔추’, 1930년, ‘귀로’, 1937년 이런 대형 풍경화를 보면 전부 몽롱체, 안개 처리로 원근감, 근경과 원경사이를 가르고 멀리 갈수록 뿌여지는 이런 방식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일본 화풍을 따라 그리는데, 산들이 전부 뭐예요? 민둥산이에요.
민둥산. 그래서 청전의 그림은 그냥 단순히 관념의 그림이 아니고 그 당시 일제 강점기, 조선 말기부터 우리나라 땅이 가졌던 그런 민둥산의 특징을 잘 구현했다, 이게 현실이죠.
이게 조선 땅의 현실을 담은 그림이다, 이렇게 저는 최근에 재해석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청전 이상범이 자기 화풍을 구축하는 건 대개 1940년대 오면서, 특히 금강산을 그리면서 개성적인 일본의 몽롱체, 일본 근대 남화풍에서 조선적인 그런 화법을 혹은 개성적인 화법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금강의 보덕굴, 보덕암이죠. 우리나라 6•25 때 금강산이 처절하게 다 폭파 되는데, 내금강 사이에 있는 이 보덕암, 이 건물만 폭파가 안됐어요, 비행기가 못 들어가서. 그 바위 절 벼랑에 15m짜리 구리 기둥을 세워서 집을 지은 거예요. 이 구리 기둥, 집을 4채 졌어요. 하나는 눈썹지붕, 팔작지붕, 맞배지붕, 네모지붕 이렇게 해서 정말 희한한 건물을 지었는데요, 이것을 이상범이 스케치한 거죠. 좀 달라졌죠. 앞에 본 몽롱체에서 상당히 신령을 사생하면서 갖는 그런 단목, 단목이 잘 깔리고 몽롱체로부터 벗어나는 양상도 보입니다. 이렇게 신령사 생하면서 왜색풍을 벗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1940년대 이상범의 스타일입니다. 새로운 변화죠.
금강산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많이 그렸는데 재밌는 거는 요런 삼선암은 조선시대 그린 화가가 없어요. 겸제나 단원은 이걸 안 그렸네요. 왜 안 그렸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뾰족 솟아 오른 게 별로 그 예술적 감명을 안 줬나 봐요. 그런데 현대조각 같죠. 현대화가의 눈에 든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현장 스케치를 통해서, 금강산 그림을 통해서 청전의 자신 화풍을 만들게 되죠. 명경대, 내금강 명경대 바위 모습인데, 이 바위 모습을 왼편은 김홍도가 그린 거죠. 김홍도의 스케치는 정말 사진을 찍어서 그린 것 같아요.
명경대 보이시죠? 저 왼쪽에 지장봉이예요, 지장봉. 그 다음에 시왕봉, 여기 황천, 황천. 제 카메라에 담은 풍경 그대로죠. 김홍도가 우리 한국 미술 전체 통틀어서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그런 지장이죠. 그에 비해서 청전 이상범 그림은 조금 단순화됐죠.
이거는 명경대를 그리면서 여러 가지 주변에 이것을 다 쳐내고 명경대에다가 초점을 맞추는 현대적인 재해석을 보여주죠. 앞에 사생과 함께 또 재해석을 보여주고. 이러면서 우리 땅 그림, 자기 머릿속의 관념 속에 있는 땅 그림의 형식을 풀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이런 1941년에 그린 진주담, 내금강 폭포 중에 팔담, 8개의 소 명승 중에 폭포 물 떨어지는 게 진주알 쏟아지는 것 같다, 진주담인데요. 바로 그 진주담을 상당히 넓게 펼쳐서 그렸죠.
이런 현대적 변형을 하면서 동시에 사생 화가로서 자기 회화형식을 만들어갑니다. 바위를 그리는 이런, 붓을 옆으로 눕혀서 쓱쓱 문지르는 거라든지, 풀섶을 서너 개의 붓 터치로 풀섶의 이미지를 만든다든지, 소나무, 등산객, 전나무, 전나무의 그런 표현, 이런 게 나중에 청전 화법, 청전의 가장 인기 있는 화법의 근간을 여기서 이루게 됩니다.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일장기 아닌 태극삽화로 곤욕 치러
그 다음에 청전 이상범은 그림만 그린 게 아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시작해서 동아일보의 삽화 기자를 했어요. 그래서 만평, 만화, 삽화, 그다음에 소설의 삽화를 그렸는데 이때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 표지와 속표지 파도 그림과 거기에 신문의 삽화 그림을 그려요.
표지는 위창 오세창, 전서체, 이순신, 제목이고요. 그리고 이순신 초상화를 그렸어요. 1932년에 동아일보사에서 기금을 마련해갖고 창전 이상범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거죠. 역시 풍경화가 전문이니까 초상화가 조금, 조금 그렇죠. 그런데 무관의 당찬 이미지는 이 초상화가 제일 적격이에요.
그 이후로 여러 사람들이, 여러 화가들이 이순신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요, 이 초상화가 가장 이순신다운 기개인데, 물론 여기에 복식 패션의 시대 고증들이 조금씩 잘못돼서 그런 것만 수정하면 대표적인 그림이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이 그림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 있네요.
이게 그 문제의 사건이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했어요, 그때. 그래서 난리가 났었죠. 그때 일본 국기를 달고 뛰었는데 이 사진이 동아일보에 오니까 이거를 누가, 체육 기자인 이기룡, 그다음에 삽화 기자인 이상범, 다음에 사진 기자인 신낙균, 세 사람이 공모를 해서 일장기를 지워버려요. 지금 왼쪽에. 이래서 동아일보가 폐간이 되죠. 폐관이 되고 세 사람은 다 잡혀가서 취조를 받고 이상범하고 신낙균은 쉽게 풀려났고 체육기자 이기룡이 감옥생활을 했고, 이렇게 했던 동아일보 폐간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때 민족지로서의 역할을 했었죠.
이때 김성수, 송진우 이런 분들이 동아일보를 이끌어 갔었고.
그런데 그러고 그냥 공주로 내려오시지~ (방청객 웃음)
서울에 계속 계시는 바람에 여기에 붙들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인 징병제 시행 홍보로 깔려있는 아픔도
왜냐하면 선전에 10회 특선을 해요. 10번이나 계속 총독상, 이렇게. 그 다음에 심사위원자격을 받고 심사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심사 참여 자격을 받고 하는 과정에, 1943년 8월 1일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이 돼요. 이 기념으로 우리 춘곡 고희동, 고희동은 여러분이 교과서에서 배웠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최초로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가서 서양화를 처음 배워온 사람이죠. 고희동이 일번으로 나서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님은 천황이죠, ‘천황의 부르심을 받들고서’하는 호랑이 그림으로 시작해서, 청전 이상범은 일장기 아래 나팔수를 그리고, 여기 43년 그림이니까, 요 안의 언덕 그림은 아까 금강산 그렸던 청전 화풍이 담겨 있어요, 그죠? 거기 이걸 그린 게 이게 다 남아 청전 이상범의 인생의 아픔이죠.
우린 지금군대가 징병제죠. 우리 징병제 전통이 이때 생긴 거예요. 이때 처음으로 생겼고. 세계 전체, 지구 전체에 징병제를 하는 나라, 몇 개나 될까요? 이스라엘하고 우리하고 둘, 대만이 있었는데 대만도 바뀐 것 같고. 그래서 징병제 전통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게 우리 역사의 또 아픔이네요,
그죠? 바로 이 표현, 금강산을 그리면서 내 형식을 만들어냈던 방식이 안에 바탕에 깔려 있는 게 또 아픔이고,
1950년에 와서 드디어 청전 화풍이 자리잡다
해방 후에 설악산을, 금강산에서 설악산을 그리고 하면서 청전 화풍이 50년 전쟁 시기에 대구공보관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그때 한 번 하네요. 그리고 전쟁 시기에 그때 그림인데 이 때는 물기가 많은 그림을 그려요. 화폭에 물기가 많고 풀섶 언덕, 그림자, 이런 게 전형으로 등장하고 초가집이나 산성, 그다음에 성문, 그 다음에 여기에 소, 등짐 진 소와 지게 진 농부, 부부, 이게 천편일률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54년에 와서 드디어 청전 화풍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 때부터 이제 그림이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남길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이거는 춘하추동. 이렇게 짝이 맞으면 예전에는 몇 억씩 했었는데 지금은 또 수묵화가 값이 시장에서 인기가 없어가지고 1000만원 때 그 아래로 떨어졌네요. 그래서 지금 공주시가 청전 이상범 미술관이나 기념관을 만들기는 딱 좋은 때야. (방청객 웃음) 그림 값이 많이 떨어졌어요. 예전 같으면 억대였는데 지금은 100만원 대, 또는 1000만원 대면 아주 좋은 그림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됐습니다. 아무튼 원두막이라든지 미루나무, 충청도에 논 혹은 언덕에, 물가에 심어져 있는 미루나무가 청전의 나무들입니다.
그래서 왼쪽에 청전 이상범 20년대, 30년대, 40년대, 50년대, 60년대, 70년대 청전 글씨가 변하죠. 이걸 왜 보여드리냐면 청전 그림이 인기가 많으니까 뭐가 많이 생겨? 가짜가 엄청나게 생겨요. 그래서 지금도 청정 그림은 얼핏 잘못 보면 다 가짜 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혹시 청전 그림을 사야 되겠다 생각이 드시면 저한테 연락을 하셔야 돼요. (방청객 웃음) 아니면 실수하기 딱 좋아요.
대표작이 1960년대, 60년에 그린 ‘유경’, 국전에 냈었고, 이 그림을 바로 청전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누가 대표작으로 꼽았냐면 삼성의 호암 이병철 회장이 이걸 찍어요. 그러니까 정말 그림 컬렉션을 하시면서 미술품 컬렉션 하시면서 안목이 크게 형상이 된 거죠.
지금 붓을 맨 뒤쪽을 잡고 붓질을 하는 그런 뒷모습, 이게 실력자에요. 소정 변관식 같으면 이 붓끝의 뒤를 못 잡아요. 밑을 잡고 그렸어요. 그래서 이 시커먼 먹을 부벽준(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기법), 혹은 절대준(붓을 옆으로 뉘어 그은 뒤 끝에 가서 직각으로 짧게 그어 마무리하는 기법), 이런 전통적인 기법을 현대화하면서 빠르게 흐르는 개울물, 엄청나게 붓이 빠릅니다. 탄력 있고.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잔잔해요, 수평 구도라. 근데 그림 안에 들어가면 아주 빠르고 강하고 강약 조절이 잘 살아 있습니다.
지금 소를 앞세우고 뒤에 짐을 진 농부 모습이죠. 귀로. 논일 밭일하고 집에 가는 모습. 근데 전체적으로는 산에 뭐가 없어요? 나무가 없어요. 이게 조선 말기에 온돌, 온돌 생활이 산에 나무를 없앴고, 일제 시기에 또 일본군이 일본 전쟁을 수행하면서 조선 나무를 다 베 갔고, 결정적인 건 또 6·25 때 미군 폭격이, 이 한반도에서 미군 폭격이 우리 산을 다 민둥산을 만들었어요. 여기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나시죠? 이렇게 숲이 우리 땅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현실, 그런 현실을 일깨워준다, 청전 이상범의 그림이. 이게 어떻게 보면 청전이 그동안 자기 인생에 어떻게 보면 어쨌든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친일 행적을 보인 데 대한 자기반성쯤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활달한 이 필치. 그래서 청전 이상범 그림은 아주 현대적인 맛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현대화 중에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 중심이 되는 구도 없이 화면을 균질하게 표현하는 회화) 그래요, 동어반복을 계속해가지고 그리는. 여러분들 요즘 단색화 이런 화가들 가운데 이런 표현은 박서보의 묘법(描法), 이런 동일한 필법을 이렇게 느슨하게 반복, 똑같은 형식을 반복하지만 오히려 청전 이상봉은 강약과 함께 화면에 생동감을 줘요.
그래서 사실은 단색화들이 요즘 몇 십억씩 하는데 청전 이상범은 지금 몇백만 원, 몇천만 원으로 떨어졌어요. 그러고 보면 속상해요. 저도 제 몸값도 푹푹 떨어지는~ (방청객 웃음) 소리가 들려요. 정말 좋죠. (네~) 청전 이상범의 붓질 감각은 사실은 세계적인, 세계 시장에 갖다 내놓으면 최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실 청전 이상범은 이거 한 점 보면 끝나요. 사실은.
60년대 그런 청전의 올 오버 페인팅 개념이에요. ‘전면 균질회화’ 이렇게도 표현하는데. 아무튼 그 현대적인 감흥을 물씬 담아냅니다. 거기에 뛰어난 붓질 기량, 먹의 농담을 풀어내는 기량, 최고였죠.
흑염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 반복한 붓 터치의 농담 변화를 그냥 자연스럽게 붓 터치를 반복하면서 이루어내는, 짙은 먹에서 옅은 먹으로 이렇게 풀어내고 거의 탄력 있는 필치 붓 선을 조화시키고. 어떻게 보면 한국 역사 5000년에 이렇게 붓질을 잘 한 화가가 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봐요. 그냥 종이를 붙이고 그린 줄 알았는데 굉장히 치밀하신 분이예요. 방안지에다가 밑그림을 연필로 그려놓고 그 위에 종이를 덮어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리면서 또 변해요. 그대로 그리는 건 아니고 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여기에 흑염소 끌고 가는 농부를 소를 앞세운 농부로 바꾸어 그리기도 하고 하면서 고성이 있는 언덕. 그다음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명경대를 한번 또 그려보고.
청전 이상범의 그림 그리는 모습이에요. 판을 세워놓고 그리고 있죠, 판을 세워놓고 그리고 있고 붓 끝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이 탄력, 팔뚝에서부터 오는 붓끝에 전한 탄력을 온몸으로 다 실어내는 거죠.
이걸 더 심화시켜 얘기하면 이 팔로 전해지는 이 기운은 어디서 와요? 심장에서 와요, 그죠?
마음에서 온다, 가슴에서 온다, 마음에서 온다, 그 심장에서 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