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데 자개로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거 아시죠? 백제 의자왕 때 일본 왕 에게 하사한 겁니다. 백제가 더 큰 나라니까.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 삼국시대 자주색 백제 바둑판, 1400년 전 백제 의자왕이 일본 왕실에 하사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해서 문양 자체는 사실은 우리 한반도에 없는 여러 가지 물성들이 나와요. 그래서 중국 거다 동남아 거다 말이 많았는데, 최근에 그 목화자단기구의 목재가 한국산 소나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의자왕, 무슨 생각이 먼저 나세요? 선생님 무슨 생각 먼저 나세요, 의자왕~ 네~ 나라 망한 왕, 예, 또? 그렇죠, 의롭고 자애롭다고 글에 그렇게 쓰여 있죠. 해동증자, 낙화암 3천 궁녀, 술 먹고 여자 좋아하다가 나라 망한 나라. 세상에 망하지 않은 나라 있어요? 로마도 망했잖아요. 근데 뭐 망한 거 얘기하면 전부 백제 얘기만 하고, 그 주인공은 의자왕. 부여 시가지에 의자에 앉아 있는 성왕상(像)이 있어요. 젊은 애들은 저게 의자왕이라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또 어떤 애는 걸상 왕이래요.
의자에 앉아 있으니 의자왕이라고?
우리 스스로, 한 학생들마저도 백제의 역사를 저렇게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의자왕은 똑똑한데 해동증자(海東曾子, 공자의 제자 중 효행이 뛰어났던 증자에 빗대어 바다 동쪽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의자왕의 효심이 깊었다는 것)보면 낯설어 보여요. 그 역사가 만들어 낸 큰 편견입니다. 의자왕 이야기, 한성 시대 전투에 돌아가신 개로왕 얘기, 전부 가짜뉴스입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중심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김부식 선생과 일연 스님이 만든 가짜뉴스예요. 의자왕이 그런 건 아니거든요. 백제문화제가 정체성이 없다고 많이들 지적합니다. 전쟁에서 패해 가지고 이리로 왔는데, 동성왕, 무령왕, 성왕에서 백제 후기의 기틀을 마련한 겁니다. 대단한 것이죠. 그쯤 되면 왕조가 없어져야 돼요. 성왕이 부여로 천도 오셨잖아요? 32년 중에 16년은 공주, 16년은 부여 계셨죠. 아마 저녁에 꿈속에 현몽하면 보일 거예요. 저 양반 누구야? 성왕이야~ 우리가 바로 이 왕도에 사는 후예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3천 궁녀 낙화암 얘기가 사실일까
백제의 역사를 공부할 때 두 가지 오류를 해요. 하나는 축소 과장, 하나는 과대 과장입니다. 3천궁녀를 거느린 다구요? 아무리 문학적인 표현이라 해도 국가의 기운이 왕성했던 조선왕국의 영정조 시대에도 궁녀들이 6, 700을 넘지 못했답니다. 제가 부여에서 오랫동안 고고학을 하고 발굴도 하고 돌아다녀 봤는데 3천 명을 먹일 데가 없어요. 그런데 자꾸 3천이라고 한 거예요. 제가 부여(부여국립박물관) 관장할 때 부여 시내에, 그 유흥음식점, 저녁에 술도 팔고 카바레도 하고 하는 그런 집, 가게를 개업을 했는데 이름을 뭐하고 한 줄 아세요? 삼천궁녀. 뭔, 삼천궁녀냐고? 백제문화제를 호화롭게 하고 거창하게 하는 것보다 우리의 가족이 있는 백제 역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여기 낙화암이죠. 고란사, 백마강이라고 그러는데, 공주는 금강이라 그러고 부여는 백마강이라고 해요. 부여 시내를 한 바퀴 돌아서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장안면까지 16km를 백마강이라고 합니다. 왜 백마강인지 아세요? 일설에 의하면 나당군(신라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 와 가지고 상륙을 하려고 했는데, 잠룡(潛龍,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이 바다에서 물을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고 해서 말하자면 침략군의 상륙을 저지했다고 합니다. 백제 의자왕의 아버지가 무왕이고 무왕은 용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당나라 장군 소정방. 소정방이 물어보니까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잠룡해서 백마강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 문무대왕의 이야기하고 비슷한 얘기예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했더니 용이 백마를 좋아하니까 백마를 미끼로 해 가지고 용을 잡으면 될 거라고. 그래서 낙화암 밑 조룡대에서 무릎 꿇고 앉아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아챘다는 거죠. 그것을 확 잡아 챈 데가 부여의 용 밭이라고 하는 용전리에 떨어졌고 그 용 썩는 냄새가 여기 공주까지 와서 “구린내”다 그랬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백마강이라는 거는요. 백마강을 백강, 백촌강이라고도 했어요. 백촌강은 일본서기에 적혀있어요. 백제 망할 때 왜군이 와서 도와줬다는 그 백촌강. 백이라는 말은 크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금강 줄기인데 거기만 금강이라고 안 해요. 그냥 백마강이라고 해요. 일본서기나 일본사람들을 보면 신라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시라기, 고구려는요? 고구리. 백제는? 구다라. 구다라가 무슨 뜻인데요? 큰 임금의 나라. 백제 의자왕 때 일본 사신으로 갔던 그 대좌평이 본국에서 왔다, 내가 갔다, 본국이라고 썼어요. 큰 임금의 나라. 낙양은 9개 왕조의 수도였거든요. 낙양 북망에는 무덤이 엄청 많아요. 북망산천, 낙양성 십리허에 〜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이냐〜, 9개 왕조의 묘역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군데가 어느 왕조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무덤이 있어요. 거기에 누가 있느냐? 의자왕이 묻혀 있어요. 95년도 충청남도와 함께 의자왕 찾기 하러 갔는데, 진짜 한강에서 바늘 찾기죠. 미르섬에서 바늘 하나 떨어지면 찾을 수 있어요? 그런데도 무모하게 갔는데 윤곽은 잡았죠. 결국은 중국 사람들이 한국 역사에 접근하는 것을 반대해 결국 조사를 못 하고 왔지만, 어쨌든 백제라는 나라는 굉장한 나라입니다.
북망산천에 묻힌 의자왕
백제 임금들에 대한 예우를 중국에서 해줬어요. 의자왕이 언제 돌아가신 지 아시나요? 660년 중국으로 끌려가 12월 달에 돌아가셨어요. 대소신료 12,000명, 왕족들 90여 명도 중국으로 압송했어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다 ‘대당평(?) 8월 15일 날 권해수가 쓰고 찬문’한 글이 있거든요. 그곳 후인들이 곡을 하고 비석을 세워줬다고 그랬는데 그 비석을 세워준 곳이 어딘지 몰라요. 진나라 호족 진숙보의 동생인 진수경의 묘지가 거기서 나왔어요. 그다음에 여러분 연개소문 아들 알죠? 연남생이 천남대건으로 개명했죠? 천남생의 묘지도 그 동네에서 나왔어요. 여러분 잘 아시는 웅진도독으로 왔던 부여융 묘지도 그 동네에서 나왔어요. 그 동네가 무슨 동네냐? 중국에 끌려갔던 망명 귀족들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의자왕도 거기에 있을 거라 판단하고 중국 정부와 한 1년 동안 협상을 시작을 했는데 조건이 뭐냐. 한국 측 학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지 마라, 발굴자로는 공유하고 돈을 주기로 까지 협상했는데 갑자기 중국 공산당 정부에서 하지 마라고해서 의자왕 찾기를 못했거든요. 낙양에 있는 북망, 북망이라는 게 뭐냐면 요, 북망이라는 산이 아니고 북쪽의 산이 없는 지역을 북망산이라고 해요. 어허이〜 어허이〜 북망산이 몇 명이녀〜 이 자식들 어디 두고〜 상여 소리 하잖아요. 북쪽의 망산, 산이 없는 곳을 북망산이라고 합니다.
구다라라고 하는 것은 큰 임금의 나라, 그래서 대국, 본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표현했던 백제가, 계속 쪼그라들어 아무나 한 번씩 툭툭 차고 가는 말이 되었어요. 의자왕을 갈상왕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 역사를 시험하면 되겠느냐?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우리 마음속에 갖지 않으면 백제문화제를 추진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 정체성을 먼저 세워야 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항시 머릿속에 있던 조상 묘를 생각하며 파보니
계단식 논이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논입니다. 그 80년대 초부터 제가 박물관에 입사를 하니까 선배들이 가끔 여기를 데리고 가요. 성묘 데리고 가잖아요. 증조할아버지 산소다 뭐다 하면서. 항시 머릿속에 있던 장소입니다, 93년도 발굴할 당시의 모습인데요, 92년도에 충남대학교 92년 충남대학교 윤미봉 선생이 이 근처에 대한 시굴 조사를 했는데 93년도 되니까 예산이 없다고 다 덮어라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제 문화재청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애걸하고 다녀 천백 몇 십만, 2,800얼만가를 받아서 발굴조사를 한 겁니다. 트렌지 탐색 피트를 쭉 넣으라고 했는데 어차피 넣어 봐야 거기서 갑자기 대단하게 쏟아지기 전에는 뭐 뭐가 안 되니까 이 부분을 제 임의로 들어냈어요, 우리 선배님 계시지만 징역 갈 일이거든요. 근데 제가 그냥 직권으로 파 버렸어요. 그래서 나온 게 이런 유적입니다. 97년도 마지막에 제가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해서 가람의 전모를 밝혀냈던 건데, 이제 우리가 얘기하는 백제 공주 시대는 이런 뚜렷한 가람 배치가 안 나오는데. 부여시대에 오면 소위 중국 그 북조의 이런 건축이라든지 도성 관계가 나옵니다. 남북 좌우 선상에 요기 남북 좌우 선상입니다. 여기서 강당(講堂, 경전을 강론하는 방), 금당(金堂, 절의 본당), 목탑, 중문, 좌우선 상에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양쪽에 회랑을 배치하는 이런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 식의 가람 배치를 가지고 있어요.
| 가람(伽藍) 절, 산스크리트 어 ‘saṃghārāma’의 음역어인 ‘승가람마’가 준 말 가람 배치(伽藍配置) 절의 정형화된 공간배치 강당(講堂) 경전을 강론하거나 법을 설(說)하는 장소 금당(金堂) 절의 본당. 가람배치의 중심 회랑(回廊)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식 가람배치. 남북축 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나란히 배치되는 형식으로 정림사터, 군수리절터, 능산리절터 등 주로 백제 사찰에서 나타난다. |
아시다시피 신라하고 백제가 한 100년간 넘게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세력을 억제를 했거든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성왕하고 함께 한강을 찾았어요. 찾고 난 다음에 신라는 군사를 돌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하류지역인 지금의 하남시하고 강남, 영등포 일대를 그걸 다 빼앗어요. 그때부터 백제는 신라와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러면서 고구려하고 굉장히 가까워져요. 그래서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전에는 고구려하고는 철천지원수가 됐었죠. 그래서 고대인의 숭배를 상징하는 고구려의 사신도(백호도, 청룡도, 주작도, 현무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무덤이 이때부터 등장하게 됩니다.
목상자와 비단은 썩어서 진토되고 그 속에서 향로가 나오다
발굴 현장의 모습인데요. 회랑이고요. 향로가 나온 회랑 북단의 건물 지입니다. 이 주추들을 봐 가지고 여기 건축에 썼던 용척을 계산했는데 35.5 cm입니다, 그런데 인지라고 하면 몰라요. 무슨 말씀이 나면, 백제가 웅진시대에는 25cm를 중심으로 한 그런 남조 척(尺, 길이의 단위)을 썼거든요. 여기서는 35cm 자를 쓰고 있어요. 이게 고구려 척입니다. 이 능사를 만들 때 향로가 나온 이 능사 건축에 고구려 기술자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거죠. 고구려와의 얼마나 긴박한 긴밀한 관계에 있었나 알 수 있죠. 이 구덩이가 향로 나온 뎁니다. 여기가 뭐냐면 공방으로 쓰던 금붙이들, 유류품, 이런 것들이 나온 거를 발굴할 때 표시를 하는 건데, 이게 우리나라에서 그 당시 나온 최초의 온돌구조입니다.

<향로 출토 모습>
지금은 뭐 이제 방 전체에다가 온돌을 집어넣잖아요. 그때는 벽에다가 나란히 해서 넣는 건데, 여기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 집안에 있는 동대자 유적(集安 東臺子 遺蹟,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삼국시대 건축 관련 유물산포지)도 이와 똑같은 구조로 해서 처음에 발굴하면서 우리 건축학이라든지 고고학 하는데, 만주에 있는 동대자 유적하고 너무 똑같아요. 이게 뭔가 종교시설 아닌가? 했었는데 결론을 못 내리다가 마지막에 이제 유적이 나오면서 확인했죠,
이 향로 사진 엄청 많아요. 대표로 지금 나와 돌아다니는 사진입니다. 12월 12일 날, 12 12. 밤에 발굴현장에 갔죠. 발굴 현장의 책임자인 제가 가서 물어본 건 세 가지 이었습니다. 하나는 안전사고 없었나? 두 번째 발굴 성과가 좀 있나? 세 번째 찾아온 손님이 없었나? 그런데 아무도 없었대요. 인부들 다 보았나? 다 보고 갔어요. 제일 걱정 드는 것이 뭐냐면 발굴 현장에서 인부들이 도둑질을 해요. 죄송한 얘기지만 컨트롤 못 하잖아요. 물건을 살짝 흙으로 덮어놓고 갔다가 저녁에 와서 물건을 가져간 사례가 종종 있거든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아시잖아요. 밤중에 저거 막 팠다고. 김종필 총재님이 하도 신문에 시끄러우니까 연락을 했어요. 사진이라도 가지고 와 보라고. 그때 사진을 포스터 만하게 뽑아 가지고 가서 보여드렸더니 ‘소설들을 썼구먼.’ 기자들이 소설 썼다는 거예요. 멀쩡한데 소설들을~ 그러면서 이제 ‘돈 좀 더 줄 테니까 가서 발굴 좀 제대로 하세요.’ ‘하나 또 있어요.’ “아니 그 또 있는 거 어떻게 아세요?” 했더니
‘우린 알아요.’ 그러고 나서 파 가지고 나온 게 철제의 머릿돌만한 모룻돌(대장간의 모루와 같이 석기를 만들 때에 받치던 돌)입니다. 공방에서 쇠 다듬으려면 밑에 대고 두드리는 거 있죠? 그게 모룻돌인데, 그래서 발굴을 계속 하게 된 겁니다. 발굴해 보니까 그냥 땅에다 묻어 놓은 게 아니고 대장간이었죠. 공방지에서 물을 써야 되잖아요. 옛날 장날 가면 대장장이들 장터에 오잖아요. 그러면은 이 사람들이 이 땅을 파요.

<향로 출토지 및 공방지>
거기다가 부뚜막 만들듯이 만들어요. 몇 바가지 물 붓고 담금질을 하거든요. 뭐 도끼 칼 날 벼리고(벼리다 : 무디어진 연장의 날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다) 하는 거 정도니까. 중국의 한대부터 나오는 시설입니다. 여기다 향로를 집어넣었어요. 그때 당시는 못 봤는데 나중에 이제 우리 조사원들이 전부 와서 조사해보니까 목상자 칠기에 넣었는데 넣기 전에 비단으로 싸서 넣었어요. 그런데 그 목상자와 비단은 다 썩어서 진토가 돼 버리고 향로가 나온 거죠.
흙 실어 날은 장비가 엉망진창, 나중에 보니까 목탑지
자, 이것은 건물지 외각에 보였던 여러 가지 기와들, 와당(瓦當 지붕에 기와 끝을 막음하는 건축재. 기와의 마구리)을요. 83년도에 매장문화재 신고를 받고서 깜짝 놀랐어요. 부여에서 없는 와당이거든요. 공주 지방 겁니다, 소위 산성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백제 와당으로서는 상당히 시대가 올라가는 와당인데, 이게 많아요. 그래서 그때 생각이, 그 주변에 뭐 여러 가지 기와 편도 많이 나오고 해서 아마도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면서 그 기와를 공급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가마가 이 근방에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해마다

<능사 전경>
그 지역을 계속 관찰한 겁니다. 이건 건물지인데 강당의 방이 두 칸이 있어요. 동쪽에 있는 방은 여기 온돌을 붙였어요. 가운데에 무슨 심주처럼, 심주처럼 생겼는데 저 용도는 아직도 모릅니다. 만주 집안에 있는 동대자유적(集安東臺子遺蹟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삼국시대 건축 관련 유물 산포지)하고 그 구조가 똑같다는 이런 평을 받죠. 이건 배수, 이제 요즘 말로 뭐죠? 맨홀인가요? 이건 금당지의 계단 모습이죠. 여기에 금당지 가람배치가 나왔는데, 주춧돌 놓았던 자리와 전면 5칸, 측면 3칸짜리 집의 이 가운데가 불상을 모시는 뎁니다. 목탑지 입니다. 그런데 목탑인지 뭔지 모르고 거기 그저 흙 실어 날르는 장비 왔다 갔다 하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목탑지 이더라고요. 목탑을 세우려면 맨 밑에 가운데 심초(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를 세워야 돼요. 거기다 커다란 기둥을 세워야 되니까 이런 아름드리 기둥을 써요. 그 심초가 있고. 그런데 느티나무 뿌리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옮겨온 것. 심주(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입니다. 목탑을 보면 가운데 이런 기둥이 있어요. 초층, 2층, 3층이 연결되거든요. 그게 이제 그것이 나온 겁니다. ‘백제창왕13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20자예요.
| 사리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사리감(舍利龕, 사리함을 넣어 두는 감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 백제 창왕 13년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 정해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 |

<석조 사리감>
누가 향로를 만들었을까?
제가 아침에 출근했는데 현장에 전화가 왔어요. 관장님, 그 돌멩이에 글씨가 있어요, 그러더라고요. 그 바라, 지금 제대로 파라 그랬잖아. 그 얘기 듣자마자 삼국사기 연표를 가지고 현장으로 뛴 겁니다. 그때 아홉시 한 반쯤 됐어요. 안개에 자욱한 날 가을인데. 그래 딱 보니까 탁본을 했는데, 백제 창왕? 의자왕, 성왕 다 있는데 창왕이라는 건 없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임금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시호를 하잖아요. 그죠? 세종대왕이니 뭐니. 돌아가시기 전에는 어떻게 불렀나를 몰랐는데 여기서 처음 나온 겁니다. 이름을 부르잖아요, 제가 이름이 신광섭이잖아요. 그 섭 자는 촌스러우니까 빼고, 광왕.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름을 붙여가지고. 백제의 임금들이 외자를 써요. 부여융, 부여효, 부요인, 부여태 이런 식으로 해서 부여를 성으로 쓰고. ‘창’, 성왕의 아드님이 위덕왕인데 생전의 이름이 창이에요. 부여창. 죽기 전에 시호가 저 왕의 칭호가 부여 창왕인 거예요. 그런 사실도 처음 나왔죠. 그 다음에 13년이라고 나오는데, 정해년이면 567년이죠. 삼국사기에는 14년이요. 왜냐면 임금이 즉위한 해도 1년으로 쳤어요. 그런데 이 백제시대 표기법에는 즉위 원년에는 원년이라 해도 1년으로 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많이 돼야 1년인 겁니다. 그래서 14년인데 삼국사기엔 567년이면 14년입니다. 그때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매형공주. 매형공주가 누구냐면 요. 부여로 천도한 성왕의 맏따님입니다. 성왕의 맏따님. 성왕의 자손이 나온 것은 아좌 태자, 형 공주, 위덕왕. 지금 드러나는 건 세 분이죠.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의 아들 아좌 태자는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태자의 스승 되고, 형 공주는 성왕의 맏따님인데 위덕왕의 여동생입니다. 이걸 보고서 그때서부터 아아! 역사의 미스터리가 쪽 풀어나가는 거예요. 금동향로에 관한 얘기, 능사에 관한 얘기가 다 풀어지는 거예요.
왜 만들었을까요?
금동대향로 왜 만들었는지 아세요? 누가 만들었어요? 저는 고고학을 하고 하면은 문자가 없으면, 기록이 없으면 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저는 막 함부로 해요. 위덕왕이 만들었어요. 위덕왕 왜 만들었느냐?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 만들었어요. 그럼 왜 아버지를 위해서 만들었을까? 여러분 아시다시피 백제하고 신라는 한 100여 년 동안 그 소위 ‘나제동맹’ 인, 군사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구려가 여러 가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신라하고 백제하고는 동맹국이자 군사 동맹국이죠. 함께 고구려를 쳐 가지고 한강 유역을 다 뺏어요. 한강 하류까지 다 뺏었어요. 한강 하류지역은 백제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신라가 차지하는 걸로 했는데 신라 진흥왕이 배신했습니다. 왜 배신을 요. 신라 입장에서는 아주 잘한 선택이지요. 그 나라가 우선이니까. 551년에 쳐들어 와 가지고 다시 뺏어 먹으니까 신라에서 백제에서 난리가 난 거죠. 성왕 태자인 부여창이 신라를 한 번 손보겠다 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금 대전 쪽으로 옥산 쪽으로 옥천 쪽으로 관산성이라는 전투. 처음에는 전쟁을 괜찮게 했어요. 근데 전쟁은 적의 10배가 이상 넘어야 먼저 선제공격을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전쟁의 승산이 없는 겁니다. 지금처럼 직업군이 아니고 그때그때 모으다 보니까 뭐 몇 개월이고 돌아다니면 집에 농사짓던 것도 다 처자식들에게 맡기고 오니까 걱정도 되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어디 제대로 된 보급물자도 없어요. 전황을 파악하러 가는데 그 정보를 신라에서 입수해 가지고 매복을 시켰다가 성왕을 잡아 죽여요. 그게 554년입니다.
그 죽이는 장면도 일본서기에도 아주 적나라하게 많이 나와 있는데, 성왕의 목을 신라로 가져가요. 경주 북청, 지금 말하면 중앙청이죠. 계단 밑에다 묻어 놓고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겁니다. 백제 2만 9천 600명이 몰살당합니다. 그때 1개 사단 규모가 한 만 명이니까 1개의 군단이거든요. 상좌평쯤 되는 좌평과 좌평 3명이 죽어요. 그러니까 말도 한 마리도 못살아 오고 좌평 4명과 용병 2만 9천 명이 죽고, 왜군의 도움을 받아서 위덕왕은 거지꼴로 부여에 돌아 왔어요. 염치가 없죠. 조정 대신들이 전쟁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근데 굳이 신라를 손봐준다고 갔다가 저 꼬락서니를 다 했으니까. 왕 취임을 안 해요. 일본서기에는 뭐 3년 만에 했다고 합니다. 무령왕이나 왕비의 장례 보면 3년을 거상하잖아요?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찌어찌해서 임금을 시키고 백성 천 명을 출가시켜서 도성을 만듭니다. 위덕왕은 초기에는 전쟁을 좀 해요. 이 가슴에 맺혀 있어요. 소방관도 화재 현장에서 인명사고를 보면 식사도 못하고 굉장히 마음이 아프답니다. 하물며 나이 30의 타자가 전쟁터에 가서 자기 휘하 부하 2만9천 600명을 몰살당하고 좌평도 다 죽고, 말 한 필도 못 가지고 왔을 때, 요즘 말하면 트라우마라고하죠. 그러면서 만든 게 능사입니다. 그 절을 만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전몰장병들의 위령 사찰을 만든 겁니다. 거기에 쓰일 향로를 만든 건데, 저는 쓰여진 문자도 없으면서 감히 그건 위덕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향로 왜 만들었어요? 여러 가지 이제 불교식 제례를 했겠죠. 그때 쓴 향로 아닙니까? 음양오행설, 산악숭배, 신선사상, 도교사상과 불교사 다 있는데 단 하나, 위덕왕은 그 향로를 통해서 평화를 추구한 겁니다. 그때 말로는 태평성대입니다. 그래서 의자왕 후기 40년은 거의 전쟁을 안 해요. 60세까지 군대 나가니까 엄청난 국력이 축적돼요. 그게 바로 무왕과 의자왕 대의 힘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저는 무왕과 의자왕은 정복 군주라고 표현을 해요. 대야성이 저 경주 깊숙이 있잖아요? 합천에. 그다음에 그 건천이라고 지금 저 KTX역 있는데, 거기까지 백제 군사가 들어가요. 그러면 신라 끝난 겁니다. 마음먹고 가서 신라 엎어 놓으려면 엎는데도 소위 의자왕 때 대야성 이하 40여 성을 공략했다는 기록은 간단한 것 같지만 얼마든지 신라를 정벌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가야는 백제하고 아주 끈끈한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고요. 우리가 미국하고 요즘 여러 가지 좋은 관계하잖아요. 백제에 전쟁나면 가야 군대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위덕왕은 그런 비참한 전쟁을 젊은 왕세자 시절에 겪고 나서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왕의 생각을 향로에 담은 겁니다. 향로는 전쟁에서 피어난 평화를 추구하는 백제의 상징이라고 말씀들일 수 있죠.
정식 명칭은 능사가 아니에요. 능과 붙어 있는 원찰이라고 해서 능사라고 했지요. 목탑을 복원한 건데 일본에 가서 목탑 조사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3층 목탑의 기단을 조사하게 했더니 갑자기 소름이 돋는 거예요. 백제 능사의 기단이 똑같은 길이에요. 백제 기술자들이 만든 탑이라는 겁니다. 일본 최고의 3층 목탑이거든요. 이런 목탑기술은 일본 사람은 못 했어요. 부여문화 단지 안에 가면 능사를 복원해 놨는데, 백제 건축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정말 예쁘게 잘 생겼어요.
향로에 새긴 여러 가지 도안들이 주는 의미
네, 향로. 봉황은 뭐냐면 요. 아름다운 새, 하늘의 새, 마지막 빛을 상징하는 새, 그러면서 소조, 신조, 천조 이렇게 해석합니다. 봉황은 이 지상에 없는 상상의 새지만 아주 상서로운 새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옛날 임금이 봉황새를 자주 자기 문장에 쓰는 이유는 뭐냐면 요. 봉황새가 이 지상에 날 때는 그냥 혼자 오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 새를 동행하고 음악을 대동합니다. 봉황이 나타날 때는 무령왕이나 성왕처럼 치세를 잘하고 태평성대를 이룰 때 나타나는 새가 봉황입니다. 난세엔 안 나타나요, 절대로. 이 향로 위에다 봉황을 얹어 놓았다는 거는 그만큼 이 향로를 만든 사람이나 이것을 주문했던 왕들의 생각이 이 지상의 태평성대를 이루면 좋겠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대가 됐으면 좋겠다 해서 이 향로를 유난히, 봉황을 강조합니다. 향로 뚜껑을 보면 다섯 마리의 새가 있는데 기러기 형상을 한 원앙이라고 했어요. 이 봉황이 나타날 때 그것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 봉황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새가 어디에 앉아 있냐냐면요. 산꼭대기에 앉아 있어요. 다섯 개의 산꼭대기에 다섯 마리의 새가 있고, 그 밑에는 다섯 명의 주악 신선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음양오행의 원류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건 양의 세계, 이건 음의 세계입니다. 물의 세계, 그래서 음양이라고. 오행이라는 것은 지금 말씀대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에 다섯 마리의 새가 있고 다섯 명의 주악(奏樂, 음악 연주)신선이 배치되어 아름다운 새가 지상에 내려온 걸 기다리며 발원의식을 하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던 석조 사리감, 백제창왕태세제 정해년매형공주사리공양이라는 글씨가 나왔지요. 그래서 95년도에 문화재 지정 신청할 때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보로, 사리명문 사리감은 보물로 신청을 했는데, 문화재청에서 갑자기 부여박물관장 밖에 와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가 들어갔죠. 그랬더니, 아니 왜 향로는 국보고 석조 사리감은 보물을 신청했냐 이거예요. 향로가 더 위고 사리감이 아래다 했더니, 여보세요, 그래도 문화를 했다고 고고학을 한다는 사람이 글씨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래서 두 개가 다 국보가 됐습니다.

<금동대향로>
1937년도에 부여에서 나온 백제 문양들, 이것 가지고 참 많이 우려먹었죠. 71년도에 무령왕릉 이후에 공주 무령왕릉 가지고 백제문화 우수성을 한 20년 실컷 자랑하다가 이제 좀 심드렁할 때 백제금동대향로가 나온 거지요. 오악사의 피리 부는 사람, 거문고 키는 사람, 북 치는 사람, 비파, 배소, 도사가 도를 닦는 모습, 새가 입에 리본을 물고 있는 겁니다. 무슨 짐승이 뱀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고요. 역사의 모습 재미있어요. 폭포에서 머리 감는 모습은 임금의 모습, 임금이 산천경계 수려한 데서 나라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목욕재계하는 모습입니다. 구멍을 뚫은 이런 공예기술이 쉽지 않다고 그럽니다.
새가 새를 물고 가는 것. 머리는 새처럼 생겼는데 이건 짐승이고, 원숭이처럼 생겨 다리가 여러 개 달리고, 도사가 나들이하는데 앞에 강아지가 앞장서는 모습. 요거는 머리는 사자인데 몸은 사람 몸이고요. 이것은 저 말에 타 가지고 활을 쏘는 건데, 말의 머리하고 화살 방향하고 사람 방향이 일치하는 것. 고구려 약수리 벽화(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실내생활도 · 사신도 관련 벽화)에서도 이른 시기에 나오는 것. 시대에 상관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도안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행엽(말 띠에 달아 늘어뜨리는 넓적한 장식)도 달려 있고요. 흙바침대 장례판도 있고, 투구도 쓰고요. 이건 임금이예요. 누가 저러고 다니겠어요. 멀쩡한 사람이 대낮에, 임금의 모습입니다. 짐승이 젖 먹이는 거예요. 이건 밑에서 보면 당초문(唐草紋 덩굴이 꼬이며 벋어 나가는 모양의 무늬)으로 이걸 사람이 끌로 일일이 다 팠어요. 그런데도 하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여기 보면 빗금들이 있잖아요. 말하자면 성스러운 기운을 표하는 겁니다. 그냥 둥그런 그 선만 넣었을 때 얼마나 밋밋하겠어요. 이건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화염문(불꽃무늬)이죠. 요즘 릴낚시도 아니고 저거 낚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게 뭔지 모르겠어요. 짐승이 있고, 고구려 벽화에 많이 나오는 화염이죠. 이건 머리는 사람인데 상투이고 몸은 새고, 여기 도사가 있고요. 영지버섯이 있고. 이건 코끼리 머리에 단 동자. 이건 진묘수(鎭墓獸 무덤 앞이나 안에 무덤을 지키는 돌로 만든 동물의 상)라고 해서 지금 여러분 석수 있죠, 무령왕릉에. 그와 비슷한, 묘를 지키는 짐승입니다. 이 저 안에서 본 구멍 뚫은 것. 그다음에 이 향로 받침하고, 노신, 연화문 이렇게 있어요.
공주 분들 다 아시던데. 이것은 수생 생물들에 대한 모습입니다. 여기 날개 달린 풍어라든지, 그런데 빗금이 굉장히 자연스럽잖아요. 중대 윤무병 박사님한테 여쭤봤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오시더니 그분이 이거 백제 겁니다. 그때는 선생님한테 말 못하죠. 한 몇 년 지난 다음에 선생님, 그때 백제 거라고 그러셨는데, 어째서 백제 겁니까? 그랬더니 백제사람 조각칼로 빗금을 했는데, 중국 사람이면 저거도 전부 주문을 했을 거라는 거예요. 이런 백제미술의 자연미, 이런 것들은 중국 사람들이 따라올 수가 없고 백제 사람들이 더 우수했다고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이게 좀 들쭉날쭉 이죠. 굉장히 자연스럽잖아요. 그리고 이사진이요, 향로 갖다 놓고 맨 먼저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 자체가 국보예요. 자, 이런 저 해달 노는 것을, 이건 신선이 이제 무예를 하는 것, 이것은 학, 이건 신선이 학을 타고 가는 것, 보통 중국에도 유사한 디자인이 많이 나오는데. 다리 하나를 이렇게 한 건너요. 중국에 없어요. 이게 바로 백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런 구도의 묘입니다. 여기 이 부분이 드러나 있었어요. 그래서 옛날에 어떤 광배(光背,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의장)편(片 조각)의 하나라고 생각 했는데 아니었죠. 무령왕릉 대도(大刀, 무령왕릉 환두대도), 여기 아까 말씀드렸던 그 불상광배편(佛像光背片)의 일부, 목걸이의 한 부분, 여러 가지 장식들, 원형 꽃장식, 공방에서 나오는 그 풍경판(風鈴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머리에 쓰는 관장식입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왔던 팔찌, 귀걸이 끝에 하는 수화식이구요. 관에 매달리는 장식, 각종 구슬류, 귀걸이, 방울, 허리띠에 매는 허리띠 장식입니다. 이것은 저 공양물이죠. 목탑에다가 공양물로 자기의 진귀한 물건을, 이제 요즘 말로 부장품들이라고 그러죠, 청년 승상, 보살상, 연화문 와당이고요.
자, 여기에 집이 한 채 있고 도승이 보는데 도교 사원이라는 말들을 많이 해요. 설이 아니고. 부여에서 나온 그 이것이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건데 부소산에서 출토한 불상광배인데요, 제가 실명을 얘기할거야, 우리 저 박물관 계통의 가장 우리가 존경하는 선배 강우방 선생이 있어요. 그분이 무연한 얘기 그때 얘기했어요. 만일에 대한민국이 다 태평양으로 가라앉는다면 백제 유물 중에 하나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 공주 관식인가요? 향로인가요? 무거워 죽겠는데 저걸 어디 가져가요. 태평양에 가라앉는데. 이거 가져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이거 하나만 가져가면 백제문화를 다 설명할 수 있다 그러시더라고요. 강우방 선생이 한 얘기입니다. 자, 부여 왕흥사, 위덕왕이 죽은 왕자로 절을 세우고 사리를 넣었다는 겁니다. 그 얘기입니다. 여기 보면 왕창이라고 있죠. 창왕이랑 똑같습니다. 죽은 왕자 사리를 안치했다는 뜻이고요.
제가 학예사 시절에요. 일본에서 아스카 시대나 옛날 절터에서 이런 공양물들이 나오면 정말 부러워했어요. 우리도 막 쏟아져 나오는 거죠. 왕흥사 미륵사 석탑 있죠? 부서져서 우리가 복원했잖아요. 그 심초에서 나온 사리공양입니다. 무왕의 아내가 누구예요? 옛날엔 선화공주라 했죠. 그래서 요즘 그쪽 분들이 물어보면요, 임금 여자 하나만 데리고 사나~ 선화공주가 첫 부인이고 사택적덕(의 딸)이 두 번째 부인이야. 그런 의미가 필요할까요? 작년에 어느 교수가 쓴 글을 가지고 백제 의자왕의 공주, 계산공주 이야기를 세미 뮤지컬로 올리고 만화도 만들고 있는 데, 역사적 사실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면 안 되죠. 좌평 적덕의 따님. 좌평은 (左平 : 백제의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16관등 중 제1품)이라면 최고의 벼슬이거든요. 백제금동대향로를 가지고 95년도에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 신청하러 갔을 때 동국대학교 불교 교수님들은 그 향로에 나타난 여러 가지 불상이 ‘수미산이다.’ 다른 두 분은 ‘수미산 아니다.’ 그것은 ‘봉래산이다.’ 삼신산 중의 하나인 ‘봉래산이다.’ 서로 논쟁을 하시는데 제가 마침 그때는 졸병 때니까 밖에서 기다리는데 부여 관장 있으면 들어오라고 그래요. 들어갔어요. ‘지금 얘기 다 들으셨죠.’ 예, ‘신 관장이 생각할 때 이게 무슨 산이오?’ 그래서 “봉래산도 아니고요, 수미산도 아니고요, 방장 선산입니다.” 삼국사기에 궁남지를 만들고 방장 선산을 만들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얘기하는 삼신산이 방장·봉래·영주산이죠.
죽어서만 갈 수 있는 신선들만의 세상을 만들다
우리나라의 서해바다 이자 중국의 동해바다에 있는 신선산입니다. 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나타난 세계는 불교도 물론 해당되지만 그 당시에 왕후장상들, 귀족들이 널리 유행했던 도교사상 이론, 신선들이 사는 왕이 죽어서 가는 세상을 신선 세상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향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불상들은 우리가 볼 때 원숭이 같다, 잉어 같다, 뭐 다 그러는데 필요 없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에 용은 보신 분이 있어요? 그런데 용을 그리라면 잘 그려요. 그런데 본 사람이 없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향로에 나타난 수백 개의 물상이나 그림들은 이 현실세계에 없는 신선들의 세계, 임금이 죽어서 가는 세상, 거기에서만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저는 이 백제의 얘기를 하면서 마지막 이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백성들은 불교를 통해서 내세를 믿고 극락왕생을 하면서 현실을 잊고 고통을 잊고 살자는 것. 그래놓고 왕후장상들은 오히려 죽을 때까지 아주 편안하고 아주 봉록을 누리고 살자며 백제 말기의 백성과 귀족들의 왕실과의 거리를 주지 않았나 생각을 하는데, 제가 그런 얘기하면 문헌사학자들은 일리가 있는데 증거가 있습니까? 그럽니다.


<원문해석>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경매하는 사람들에게 경매에서 나오면 얼마를 부르겠느냐 했더니 4천억 부르겠다고 그래요. 30년 전 얘기입니다. 중앙박물관은 유물을 대여하잖아요. 중앙박물관에서 부여로 대여해오지 않습니까? 그럼 보험을 물어요. 저 보험 평가액이 얼마인지 아세요? 300억입니다. 그 당시 반가사유상을 시드니 올림픽에 보낼 때 23억에 보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조선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 낸 판각 원본)있죠. 그것을 간송미술관에서 박물관으로 모실 때 56억에 모셔왔어요. 그런데 이 금동대향로는 부여에서 중앙박물관 개관전시 보낼 때 300억에 평가 되는데 저는 400억 이상이라고 했더니 자꾸 올라가면 보험료를 더 내야 된다고 하더군요. 발굴할 당시 한국 최고의 문화재, 나아가서는 동북아 최고의 걸작이라고 얘기를 했고, 유일하게 지금 30년 동안 해외를 한 번도 안 나간 백제금동대향로입니다. 앞으로 못 나갑니다. 누가 나가자고 할 수가 없어요. 2003년인가요? 월드컵의 공동개최 할 때 일본 동경박물관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문화재위원하고 우리 몇 분이 반대를 했어요. 우리도 좀 와서 보라는 것 하나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우리가 조건을 내세웠어요. 정말로 이 백제금동대향로 가져가고 싶으면 일본 광륭사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그걸 보내주라고. 일본서 보낼 수가 없죠. 국가가 관리할 수 없는 개인 사찰 거니까. 그걸 가져가는 순간 그 사찰은 문을 닫아야 돼요. 그러나 백제에서 해외에 딱 한 번 나간 적이 있어요. 제주박물관 개관할 때 보냈어요. 우리가 제주박물관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여기서 인천에서 배로 싣고 갔다 온 겁니다. 두서없이 했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집중호우로 성곽이 무너져 성곽걷기를 할 수 없었지만, 행사 전 공주출신 연주가(1클라 김미영, 2클라 이지혜, 건반 임소리)들로 구성된 『칸타르』가 Love Theme, 여인의 향기, 호랑수월가, 캐논, 버터플라이, Yesterday once more 등으로 참석자들에게 이야기 주제의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었다.
지난 5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다 개최한 2023공산성 달밤이야기&콘서트는 신광섭 대표이사(전 국립부여박물관장)가 11회로 끝났다. 하지만 블로그와 T스토리, 유튜브(공산성 달밤이야기 검색)를 통해서 다시 보기할 수 있다. 이 행사는 문화재청과 공주시, 충청남도가 지원하고, (사)한국문화재안전연구소(소장 이태묵)가 주관한다.

<글로 옮긴이 이태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