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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교수의 공산성 달밤이야기 "웅진성과 백제왕릉"

공주는 제가 1992년부터 공주박물관에 근무를 한 적이 있었어요. 7년 근무를 했는데, 아까 오면서 생각을 해봤더니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그 당시 공주박물관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은 지금 어떻게 사실까?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박물관에 처음 왔을 때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던 선생님들이 살아 계신다면 구순 팔순 되실 것 같아요. 저도 흰머리가 생겼어요. 세월 정말 빠르구나 생각이 들었고요. 윤용혁 교수님은 젊은 시절부터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오늘 여기서 뵙게 되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이 웅진성과 백제 왕릉이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지만 공산성 일부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깜짝 놀랐어요. 몇 년 전에도 일부 성벽이 무너져서 토층 그런 것도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공주시민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많이 노력을 해서 세계유산이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옛날의 유적이지만 그것은 현재이자 앞으로의 미래입니다.

 

 

                                                           공산성을 백제 때는 웅진성이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같이 있는 이 공간이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불렸어요. 잘 아시겠습니다만 웅진성은 백제의 왕도로 오랫동안 기능했고요. 서기 475년에서 538년까지니까 62, 63년 정도 백제 왕도였지요. 그 이후에 사비 시기에도 여기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어요. 백제의 왕이 와서 한동안 있기도 하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 누구죠? 의자왕이 마지막에 여기 피신했다가 결국은 항복한, 그런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 공산성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공산성이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여기를 웅진성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웅진성이 공산성으로 국한된 건지, 아니면 지금 제민천 쭉 따라가면서 좌우에 펼쳐진 현재 공주의 강남 일대가 웅진성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제가 1990년대 초반에 발굴을 좀 해봤더니 바로 여기서 가까운 정지산, 이곳도 옛날 백제의 취락이 있었고 교동아파트 쪽에도 백제의 취락이 발굴됐었어요. 옥룡동, 주미동 일대에도 백제 고분이 있는 곳으로 본다면 이 금강 남쪽의 공주 전체가 아마 뭔가 당시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집 자리, 집터, 무덤들이 앞으로 계속 발굴될 가능성이 있어 근래까지는 공주 시가지보다는 주변에서 발굴들이 많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공주에 사시니까 늘 이 공주 시내에 이 유적들이 훼손되는지도 살펴보시고, 문화해설사 선생님들께서 그런 내용과 역사적인 정보를 전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강의를 할 때마다 표지 모델을 늘 고민하고 있어요. 공주에서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석수를 트레이드마크로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버스에서 보니까 왕비 관식 이런 게 있기도 하고요. 무령왕릉 석수는 지금 국보로 물론 지정되어 있고요. 제가 매달 한 번씩 공주시 시정 홍보지에 간단하게 그렸습니다만 이번에는 석수를 한번 써보았어요. 비밀정보를 하나 공개했는데 석수의 뿔은 가짜다이런 거. 지금 보시는 국보 석수의 뿔은 플라스틱입니다. 진짜는 어디 있을까요? 박물관 금고에. 지금은 아마 좀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만, 만약에 저 석수가 1971년도에 발굴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모르는 그런 정보잖아요. 저도 매일 공주 부여 일대의 발굴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왜 백제수도를 왜 하필 공주로 옮겼을까?

 

오늘 공산성 이야기를 네 가지 꼭지 정도를 한번 추려봤습니다. 우리가 공주하면 백제,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백제라고 하는 국가는 실제는 언제 건국되었는지 학자보다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는 것은 언제죠? 475, 부여로 천도한 것은 언제죠? 538,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 국민들도 백제 수도가 어디야? 공주 혹은 부여. 그런데 실제 서울이 백제의 오랫동안 왕도였다는 건 잘 모르는 분도 많다고 해요. 한성, 웅진, 사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현재의 충청도 일대로 수도를 옮기게 된 것이 옮기고 싶어서 옮긴 게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백제 개로왕께는 굉장히 영특한 분이셨는데 정치 만년에 가서 정치를 잘 못하셨어요. 특히 외교, 국방이 상당히 약했던 것 같아요. 만년에 가서는 고구려의 승려의 꾐에 빠져서 매일 바둑만 두고 그랬다고 하잖아요.

 

무리한 토목공사를 해서, 어쨌든 백제가 망할까 말까? 이러던 찰나에 장수왕이 475년 가을에 공격을 했잖아요. 개로왕은 기병 몇 십 명 데리고 도망가다 잡혀서 죽었어요. 백제의 왕, 왕족들 다 죽거나 사로잡혀 가는 그런 상황에서 급하게 475년에 당시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가 공주로 천도를 해요. 제가 왕이었더라면, , 내가 대표로 죽겠다, 이런 각오로 고구려 군과 싸웠을 것 같은데. 문주가 경주에 갔다가 와보니까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어디론가 천도를 해야 되잖아요? 당시 급하게 천도한 것이 바로 이 공주라고 하는 곳이에요. 공주가 그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역사, 백제 전체 역사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그런 곳 이었는데, 475년 가을부터 드디어 삼국시대의 강력한 나라 중에 하나인 백제의 왕조가 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섰고, 그 시점 때문에 저도 오늘 여기 와서, 백제에 대해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백제가 웅진 천도를 하게 된 배경이 뭘까? 왜 하필 공주야?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조금 고민을 해본 적도 있고, 글 쓴 적도 있는데 그때 저는 카피를, 저런 카피를 했었어요. 믿을 세력을 찾아 나선 곳이 바로 웅진 천도라고. 아마도 지금 현재까지 발굴성과를 본다면 서기 5세기 대의 백제 유물은 서울에 별로 없어요. 서울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발굴하는 데 가 보면 물론 성도 크고 고분도 크지만 거기서 많은 유물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근데 서기 5세기 대에 가장, 굉장한 유물이 나온 곳은 바로 공주의 수촌리이죠. 고분이 발굴되면 첩보가 입수가 돼요. 제가 그 당시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모 대학에 이렇게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 연합뉴스에 있는 모 기자가 전화가 왔어요. 공주에서 따끈따끈한 뭐가 나왔데~ 그래서, 알려줘~ 그래서 제가 첩자활동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때 그 기자를 데리고 거기를 가서 봤어요. 그랬더니 간 날 막 금동관을 발굴하고 있었어요.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굴했고 그 당시 이훈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이 발굴을 하셨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공주에서 그런 유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

 

                                                                              <공산성과 주변지역>

지 못했는데. 그때 제가 본 것은 1호분이었는데 4호라고 하는 무덤에서 또 나온 거예요. 1971년도에 발굴된 무령왕릉은 서기 520년대 무덤이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한 100년 전에 그 비슷한 유물들이 공주 일대에서 나올 거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백제가 여기에 천도한 것이 475년 있잖아요. 거의 400년 언저리에 거의 백제의 왕이 있었음직한 관, 귀걸이, 허리띠, 금동, 신발, 칼 이런 게 막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거야,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백제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 할 곳은 수촌리유적

 

2000년대 초반에 발굴한 수촌리고분군이죠. 그래서 특히 제일 왼쪽에 있는 유물이 수촌리 1, 용무늬를 보면 엄지손톱만한 용 한 마리. 제가 눈이 나빠서 이렇게 봐도 잘 안 보이고 돋보기를 딱 보면 용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정교하죠. 아주 수준 높은 장인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지금은 저런 색깔이지만 당시에는 번쩍번쩍하는 이런 것이었어요. 저런 걸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백제에서도 저는 열 명 되었겠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열 명 중에 한 명이 공주에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강력한 리더십이랄까, 아니면 부랄까? 믿을 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공주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공주 있으니까. 475년에 천도 했잖아. 백제가 공주로 천도했을 이유가 바로 그런 거예요. 웅진성과 백제 왕릉, 백제의 문화, 다 중요하긴 하지만 아마도 제가 생각할 때는 백제문화를 공주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첫 스타트로 수촌리 고분군부터 이제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공주 고도의 중심지인 강남에서 조금 멀긴 하지만 수촌리 고분군 주변에 토성도 있습니다, 수촌리 토성. 공주를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께서 여기만 주로 보시잖아요. 앞으로 셔틀운행 등으로 거기를 어떻게 쉽게 가서 볼 수 있는 세트유적을 좀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금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고대사회에 금은 더 중요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돈이 있다고 해서 선생님들이 금을 가지실 만한 지위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 당시 금은 굉장히 귀하기도 하고 그 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왕이 오케이~ 할 수 있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로얄 패밀리들만이 배타적으로 가지는 그런 물건이에요. 금귀걸이 금동관을 쓰고 어디에 가면 구별이 되잖아요. 사람마다 프레스티지 이런 게 있지요. 어디 갔을 때 벤츠에다가 고급 양복, 저런 걸 짝~ 귀걸이를 하고 가면 다르잖아요. 우러러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서기 5세기 대에 백제 사회에서도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 문화에 그런 문화 향유한 핵심 인물 하나가 공주에 있었다는 건데, 그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자손 대에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예를 들어 이 수촌리 4호 잖아요. 아까 1호보다 4호가 30년 정도 늦어요. 수촌리는 1호 남성, 2호 남성 여성, 3호는 잘 모르겠고 4호는 남성, 5호는 여성이에요. 그런데 귀걸이나 금동 신발은 여성 무덤에서도 나오는데 금동관은 남성 무덤에서만 나왔어요. 그 당시에 남녀가 평등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30년 단위로 아버지가 그런 권력을 누렸으면 그 다음 대까지도 이 금동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수촌리 4호에서 중국에서 만든 도자기도 나왔어요. 물 건너온 도자기니까 엄청 비싸지 않았겠어요? 이런 것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죠. 어쨌든 5세기 그 당시 백제는 현재 서울, 경기, 충청, 전라, 강원 등 일부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는데, 그중에서 아까 제가 한 10명 말씀드렸지만 지역으로 따지면 넘버 3 안에 공주 세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수촌리 1호묘>
 

                                                                               

                                                                               <수촌리 4호묘>

 

공주에 차령산맥도 있고 금강이 있고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에 여기 우리 천도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방어 라인도 되지만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 그런 거예요. 물류의 고속도로. 그러니까 외국과 교류할 때도 교류하는 것입니다만 세금을 잘 거둬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물길을 따라다니면서 여기저기서 세금을 쭉 많이 걷는 거예요. 당시에 세금을 걷어서 보관했던 창고가 미호천에서 발굴되었어요. 금강 일대에서 이렇게 거둔 세금들을 모아 두는 창고. 세금을 거둘 때 공주세력들이 좀 관여했을 가능성을 두고 최근에 고대사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공주가 만만치 않았다. 공주에 계신 분들은 프라이드를 475년에서 538년 너무 짧아 그게 아니라 이미 5세기 뒤에 부터 넘버3 안에 충분히 들었다 그런 것이고 아마 부여로 천도하고 난 이후에도, 부여가 왕도이지만 여기 북방성이 있었고요, 거의 백제왕이 늘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니까 넘버1에서 넘버2가 되었지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한성 넘버3, 웅진 넘버1, 사비 넘버2, 평균 내면 전체에서 넘버1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제가 공주, 공주라고 해서 너무 그렇게 하나요? 아까 보셨던 그런 유물들은 대부분 평소에 썼던 물건이지만. 예전에는 장례를 너무너무 중요시했어요. 그때 백제는 순장 풍습이 없었어요. 그런데 가야나 신라에는 그런 풍습이 있었잖아요. 순장 풍습이 잘 보여 지던 고대 사회에서는 사후세계를 대단히 중요시 했고 그러다 보니까 무덤을 크게 만들고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 그런 게 5세기 6세기 대의 특징인데. 당시에 왕족이나 귀족들은 특별한 장례 의례 같은 것이 있었고 장례식을 거행할 때 금동신발 한 켤레 정도는 만들어서 신겨서 무덤에 모셔야지 그분이 뭔가 그 신발을 쫙~ 요즘에 비행기 타듯이 타고 천상세계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실제 그렇게 논문을 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백제에선 그동안 18켤레 정도 금동신발이 나왔는데 무령왕릉에서 2켤레 나온 건 아시죠? 그런데 18켤레의 중에서 수촌리 고분군에서 4켤레가 나왔습니다. 공주에서 18분의 6정도가 나왔으니까 어쨌든 공주가 백제의 중심지라고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1971년도에는 백제사가 또 백제, 특히 웅진 시기의 역사가 굉장히 화제도 되고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런 한 해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역사를 연구할 때는 역사 기록을 가지고 연구를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은 삼국사기라고 하는 텍스트를 주로 많이 하고 삼국유사를 또 많이 보지만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많은 내용은 신라가 중심입니다. 백제에는 사실 역사 기록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삼국사기를 달달 외우지 못하지만 필요한 거 다 이렇게 읽어보면 특정 왕이 있잖아요. 백제 여러 왕들의 스토리를 보면 바탕이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탕이 안 되는 그 역사 기록을 가지고 그 분들이 재위했던 몇 십 년, 짧게는 몇 년이지만 그 역사를 복원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 오늘 말씀 말씀드리는 이 웅진성, 그다음에 산성 그다음에 무령왕릉 같은 그리고 왕릉의 새로운 유물, 그 유적 자체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당시 사람들이 그걸 만들 때부터 지금 우리가 그걸 다시 발굴하고 아끼고 연구하는 시점까지를 쭉 보면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있어요. 저는 공주박물관에 64개월 정도 근무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정리하고 그런 걸 많이 했어요.

제가 1992년도 8월 달에 박물관에 발령을 받았어요. 공주에 제가 기분이 엄청 안 좋아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 중동에 있는 박물관이 있다고 온 거예요. 그랬더니 그 박물관이 이렇게 산꼭대기, 그 앵산 공원이라고 불렀나요? 거기 올라갔는데 좁고 답답하고 중앙박물관은 엄청 컸잖아요. 거기에 근무해야지 그 생각 했는데. 그래서 며칠 있으니까 드디어 저에게 열쇠를 맡기는 거예요. 마음만 먹으면 평소에 사진만 봤던 무령왕릉 유물을 꺼내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된 거죠. 갑자기 제가 마음이 조금 금에 녹아서 조금 수그러졌어요. 박물관에서는 수장고라고 그럽니다마는 수장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너무 작은 거예요. 박물관 수장고가 엄청 큰 줄 알았어요. 박물관 한쪽 구석에 갔더니 쓰레기가 이만큼 있더군요. 나름대로 깔끔한 성격이라서 청소를 막 하려고 봤더니,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그대로 이었던 것. 나왕으로 짠 나무상자가 20여개.

, 드디어 이제 평생 연구할 걸 찾았어.” 27. “이제 야, 이래선 안 된다.” 이제 직원들을 학생들 데리고 가서 그날부터 박물관 유물을 정리해 보니까 거기에서 금 구슬, 유리구슬이 엄청 나오는 거예요. 그야말로 발굴이에요. 이거 무령왕릉을 발굴하는 거잖아요. 처음에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인지 몰랐고 막 정리하다 보니까 벼 껍질이 엄청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보도자료 하나 만들었어요. “무령왕릉 발굴품에서 벼 껍질 다수 출토쌀을 그대로 묻어 줬나봐 이러면서 이제 보도자료를 만들었더니 당시 관장님이 딱 스톱을 거셨어요. ‘다시 생각해 보자.’ 찾아봤더니 그게 1970년산 볍씨라는 걸 알았어요. 왜냐면 무령왕릉이 71년도 79일 날 새벽에 발굴이 끝났잖아요. 동은 터오고 김원룡 선생님이 큰일 난 거예요. 유물을 담을 상자가 없었어요. ‘, , 쌀가마니, 볍가마니 없어?’ 그러니까 정미소에 가서 그런 걸 갖다가 유물을 막 들어 담아서 박물관에 갖다 놓은 것이 20년이 지난 거예요. 그러면서 공주박물관의 유물들을 정리했는데 제가 박물관에 있을 때는 2400점 정도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박물관에 알기로 5천 몇 백점이 나왔다고 알려져 있어요.

 

                                                        “특종일까 낙종일까” 아수라장된 발굴현장

 

그때, 워낙 시간이 급했잖아요. 고고학자가 먼저 들어가야 되는데 고고학자가 들어가지 않고 신문기자들이 먼저 들어갔어요. 원래 언론에서는 특종이 중요하잖아요. ‘무령, 공주에서 왕릉이 나왔데이런 소문이 처음 나온 거예요. 한국일보의 허영환 기자라고 하는 분이 먼저 들어갔어요. 특종을 한 거죠. 그랬더니 다른 신문기자들이 어떻게 되었죠? 낙종이라고 부르잖아요. 발굴 현장에 와서 멱살을 잡아요. 당시 담당 과장님 뺨 때리고. 그러니 얼마나 아수라장인지. 당시 국립박물관장인 김원룡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이 발굴책임자셨죠. 생각해 보니까 저보다 성격이 훨씬 급했던 것 같아요. 평안도 사나이인데, 그분이 안 되겠다오늘 발굴 끝내버리자그래서 하룻밤 만에 뚝딱 발굴로 끝내버린 거예요. 계속 발굴하면 되는데 못 참은 거죠. 너무 중요한 게 나왔으니까. 나와서, ‘뭐 나왔어요?’ 이렇게, ‘백제 25대 무령왕릉이에요.’ 그러니까 기자들이 어떻게 해요? ‘사진을 찍어야죠. 내가 낙종은 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사진을 먼저 찍겠어.’ 그분들이 들어가서 죄송하지만 발을 조금만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가 여기에 제사상이 있었어요.’ ‘제사상 밟았어요.’ ‘부러졌어요.’ ‘제사상에 올렸던 청동숟가락이 부러졌어요.’ 그다음에 들어가다가 여기 뿔을 쳤어요.’ 얼마나 아팠겠어요. ‘뿔이 부러졌어요.’ 그 뿔(석수뿔)은 지금까지 계속 박물관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들어갔는데 안에 뼈가 나왔어요. 김원룡 선생님께서, ‘, , 조용히.’ 뼈 나왔다 그러면 난리가 날게 아니에요. 그래서 봉투에 공무원들이 쓰는 봉투, 노란 봉투에 무령왕릉 인골 써서 박물관으로 먼저 가져왔는데 그 이후에 38년간 박물관 금고에 들어 있었어요. 저도 매일 금고를 열면서 그 서류봉투에 무령왕의 인골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리고 38년 있다가 그 꺼내서 분석하니까 이미 너무 공기에 노출된 유골에서 DNA를 추출할 수가 없다고. 제가 계속 나쁜 면만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좋은 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뒤집박죽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될 된 거예요.

 
 
<무령왕릉>

 

 
 

                                                  삼국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한 점을 고르라면 무엇일까?

 

무령왕릉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오늘같이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공주일대 유적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시대 유물들을 보면 국보도 상당히 많고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유물을 한 점만 고르라면 저는 무령왕릉 지석을 꼽고 싶어요. 경주에는 무덤이 엄청나게 많고 발굴도 지금 수백 기가 발굴되었거든요. 백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무덤이 발굴되었지만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야? 이렇게 알 수 있는 건 없어요. 물론 경주에 가면 태종무열왕 김춘추 무덤은 당연히 거기가 김춘추릉이라는 걸 알았겠지만 발굴하기는 쉽지 않아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돌판 지석 두 장 때문입니다. 사마왕이라 불렸다, 62세에 돌아가셨다, 3년 상을 치렀다는 것. 돌 판이 두

 
                                                                                         <지석>

나왔는데 앞뒤 그렇잖아요. 1, 2, 3. 3면은 매지권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당시에는 지하세계의 토지주인은 지신의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고 한 것 같아요. 물론 이곳 지상의 부분인 백제의 땅은 백제왕의 소유이지만, 지하세계의 땅은 지신들 것이란 인식이 있어서 그 땅을 돈을 주고 산다는 의미. 그래서 지석을 두 페이지를 이렇게 겹쳐서 안에 구멍이 있잖아요. 끈으로 묶으면 요즘 토지매매계약서 같은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첫 페이지는 왕께서 돌아가셨고요, 3페이지는 지신들에게 땅을 산다는 내용이 이잖아요. 등기부등본. 그걸 떼면 뒤에 지적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렇게 토지매매문서처럼 이해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본 유적이 중요한 유적이 된다

 

그다음에 제가 상당히 좋아했던 기록 가운데 하나인데, 1996년도에 제가 여기 가까운 정지산을 우연하게 발굴하게 되었어요. 박물관에 저보다 커리어가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들이 발굴하기 싫어했다고 할까, 중요한 유적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예요. 중요한 유적이면 공산성 혹은 무령왕릉 주변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들만 본인들이 발굴하고 싶어 했을 거예요. 그런데 금강 변에 있는 야트막한 능선을 지표조사로 했어요. 도로가 개설 전에 유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걸 지표조사라고 해요. 그 당시는 기와의 무늬가 없으면 이게 백제 건지, 통일신라 건지, 고려 건지 잘 몰랐어요. 선배 한 분이 가봤더니 기왓장 몇 장이 있다는 거예요. 제일 졸병인 제가 96년도 21일쯤에 가서 발굴 했는데 백제의 궁궐에서 나오는 기와가 막 나오고 그해 가을 겨울이 되면서 아, 유적이 아마도 백제 무령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시고 그분들의 유해를 모셨던 빈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이후에 저를 무척 비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지금도 빈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연구를 해야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막 드네요.

 

왕릉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만든 여러 가지 작품이지만 디자인적으로 볼 때는 지금 보더라도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죠. 그게 백제문화이자 백제의 힘이고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가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백제의 많은 유물이 있지만 그 가운데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하고, 현재 더 많은 국보를 만들자는 공주 시민운동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1순위 후보가 바로 이 칼이라고 생각 있습니다. 요즘은 3D 스캔을 해서 훨씬 정밀한 그림 이렇게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저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가 한 15년 전에 그림을 그렸던 거예요. 그래서 봤더니 실제는 요만한 칼입니다만, 크게 보여드리는 거예요. 여기가 비늘이에요. 실제는 아무리 눈이 좋으셔도 실제 박물관에서 보셔도 안 보일 정도로 용이 이렇게 한 마리. 이 뒤쪽에도 용이 한 마리가 또 있어요. 3개 머리가 있어요. 유자를 이렇게 보면 비늘이고요. 뒤쪽으로 반대가 되어 있는데 비늘이에요. 용을 정확히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다시 주물로 이렇게 만들어 낸 거예요. 일본 학자들은 발굴되고 난 이후에 이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상당 부분을 Made in china 라고 주장 했어요. 특히 이 칼의 경우는 백제에서 만들 수 없다고 한 거죠. 지금도 일본 학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환두대도(環頭大刀, 손잡이 부분에 둥근 모양의 고리가 있는 칼)를 양나라 무제가 백제 무령왕에게 하사한 칼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에 향로도 나왔고 또 무령왕릉에서 나온 여러 가지 유물들, 최근에 부여해서 나온 유물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니까 백제에서 이걸 못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수촌리유적,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서기 400년 언저리 무덤이거든요. 퀄리티로 따진다면 약 한 70% 정도 수준으로 만든 게 100년 전에 그런 칼이 만들어졌어요. 100년 동안 얼마나 많이 실력이 늘었겠어요? 어쨌든 6세기 초에 백제에서 만든 그런 것이에요. 무령왕릉 발굴 53. 발굴이 53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가 그렇게 많이 안 된 거예요. 앞으로도 무령왕릉, 특히 웅진 백제문화에 대한 연구 꺼리는 무궁무진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겠다고요.

 

                                                                     ‘이 유물은 메이드 인 신라야’

 

백제는 웅진에 도읍을 했잖아요. 63년간 도읍을 했는데 그때는 거의 백제가 망할까 말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였어요. 475년에 여기 왔다고 했잖아요? 왕들이 연이어 계속 목숨을 잃고 백제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겠고. 지금의 세종까지 거의 고구려 군이 주둔하고 이런 위기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 대를 지나고 특히 무령왕 대 오면서, 갱위강국(更爲强國,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 갱위강시(更爲强市, 다시 강한 시를 만들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만, 백제가 드디어 반석 위에 이렇게 올랐잖아요. 신라와 교류했던 흔적들, 또 중국과 교류했던 흔적들이 무령왕릉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나온 유물, 무덤의 구조, 그런 걸 잘 연구 보면 그 당시 백제가 글자 그대로 그냥 갱위 강국 이렇게 역사에 기록에 나오지만 갱위강국의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은 이런 유물유적을 통해서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유물의 경우도 왜 이렇게 연구가 많이 안 될까? 그래서 조금 많이 궁금해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1991년도 8월 달에 공주박물관에 발령받았다고 했었잖아요. 근데 딱 와보니까 박물관장님이 제 대학교 13년 선배로 성격이 과격하셨어요. 그러나 연구역량은 탁월하셨어요. 그 선생님이 저한테 중요한 것 딱 하나 알려주신 게 하나 있어요.

 

 

                                                                                <무령왕릉 출토품>

 

이 유물은 메이드 인 신라야~’ 송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거예요. 저는 놀랐어요. “? 지난번에 제가 논문을 읽었을 때는 메이드 인 백제라고 읽었는데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신라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어요. 경주에 금관총이라고 하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허리띠하고 똑같이 생겼어요. 저 한테 연습을 시켰어요. ‘유물을 꺼내서 그림을 그려봐.’ 그래서 제가 모눈종이에 놓고 막 그리는데 그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발발발 떨고, , 조금만 사이즈가 틀리면 주먹이 날아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좀 들고.(웃음) 제가 유물 2점을 그리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어요. 그림을 갖다 줬더니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나 봐요. ? 왜 백제의 왕족 무덤에 신라의 허리띠가 있지? 연구를 해 봤더니 당시 삼국사기에 단서가 있었어요. 동성왕께서 만년에 결혼을 한 번 더 하셨어요. 신라의 왕족인 여성을, 아마 원래 왕비가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그냥 더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국혼이 있었어요. 두 나라 사이에. 저는 그 신라의 공주 혹은 그 당시 이찬(伊飡, 신라시대 17관등 중의 두 번째로 진골만이 될 수 있는 관등)의 딸이면 공주나 마찬가지죠. 그분의 소유물일 거야. 그분이 결혼해서 올 때에 뭔가 본인의 아이덴티티, 정체성과 관련되어 쓰던 물건들을 경주에서 가져왔을 게 아니에요. 그죠? 어릴 때부터 왕으로부터 받았던 것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스토리텔링하면 굉장히 재밌는 스토리로 생각했는데, 제가 이런 논문을 써도 고고학자도 인용하지 않고 다른 분들도 이용하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도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라 공주와 동성왕의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일 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유물은 중국의 강남지방에 있던 다리미에요. 우물 같은 구덩이를 중국 사람들이 발굴했는데 구덩이 속에서 다리미가 하나 나왔어요. 다리미 뒤에 빨간 글자가 쓰여 있었어요. ‘누구누구 거, 언제 여긴 묻었다이렇게 써놓은 거예요. 왜 묻었을까요? 지금은 전쟁이 자주 나잖아요. 그러니까 구덩이에 파묻고 도망간 거예요. 나중에 네 것, 내 것 할까 봐 썼죠. 그 주인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국에선 그런 유적이 많아요. 고고학자가 서안 같은 곳에서 운이 좋으면 한 구덩이를 파면 금이 잔뜩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 유적이 중국에 많아요. 근데 여기에서 나온 것하고 무령왕릉 다리미가 똑같아요. 이제 무령왕릉 다리미를 메이드 인 양(중국 6조 시대 중 남조)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제가 설명을 했더니 너무 중국을 좋아하는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거는 앞으로 짚고 넘어가야 돼요. 중국 거, 중국 거를 카피해서 만든 것 혹은 그런 부분들을 앞으로 우리가 좀 연구가 진행되면, 진전되면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이고요.

 

                                                                     백제 땅은 어디까지 이었을까?

 

서울이 백제 수도 이었을 때 백제 땅이 어디일까요? 백제의 땅이 어디까지였는가 지금 논란이 엄청 많아요. 공주는 당연히 백제 땅이었을 거고. 부여, 전라북도, 전라남도는 당연히 백제라고 생각하는데 근래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일부는 마한(馬韓)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많아요. 공주나 부여나 서울에서 사시는 분들은 백제를 크게 보는 입장이죠. 그런데 광주, 목포, 전주에 계시는 분들은 마한 특별법을 만들었어요. 우리 마한은 백제가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올해에도 아마 상당히 수십억이 마한 역사를 복원하는 데 쓰일 거예요. 우리는 마한이야, 별도로 하는 거예요. 그 시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같이 이 역사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으로 공동 연구를 했는데 교수님은 분명히 저하고 의견이 똑같았는데 교수님 한 분이 갑자기 마한이라고 얘기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어쨌든 우리 현재 논란이 되고 있어요, 어디까지가 백제인가? 백제가 굉장히 강국이었잖아요, 사실은. 갱위강국, 근초고왕 때부터 이미 전라도, 영산강 유역까지 가서 굴복시키고 혼내고 세금도 바로 내고하는 마당에 거기가 백제의 지방이 아니라는 이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앞으로 연구 테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근래에 오른쪽 같은 저런 유물이 영암이라고 하는 곳에서 나왔어요. 지금까지는 공주에서 나오지 않고, 호남에서만 2점이 나왔기 때문에 호남은 별도의 왕국이 있어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정지산 유적도 세계유산권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공주에 정지산 유적입니다. 4차선 도로구간으로 편입되어 1996년도에 발굴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유적이 너무 중요한 유적이라서 저희가 사실은 조금 학계에 여기저기 설명도 하고 또 문화재위원들을 미리 찾아가서 보전 좀 해주세요.’ 그렇게 좀 빌고, 그리고 그 당시에 공주시민들이 인쇄를 해 가지고 아침에 낱장으로 다 공주 신문에 끼워서 이 유적 정말 중요하다이런 홍보를 했죠. 그런데 1996년도 12월 며칟날 정지산 언덕에서 그 유적을 공개하니까 시민들이 거의 안 오셨어요. 좀 아쉽긴 했지만 다행히도 문화재 의원들의 반대로 이 유적이 보존된 거예요.

 

 

 

                                                                                 <정지산 발굴지>

50만 원을 마련해서 모터글로글라이더를 타시는 분을 섭외를 하고 그분 등에 고고학자가 업혀서 공중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엄청 중요한 사진이에요. 지금은 드론을 띄우잖아요. 그런데 그때 드론이라고 하는 것이 없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아쉬운 것은 정지선을 촬영 이후에 부여의 남산리라고 하는 유적을 촬영하시다가 떨어져서 조종사는 돌아가시고 고고학자는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했죠.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그 선생님이 생각나게 하는 사연이 있는 사진입니다. 이 정지산이라고 하는 유적을 제가 보여드리는 이유는 백제 유적 권에는 안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걸 면으로 좀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이었어요. 이스탄불을 보니까 도시 자체가 그냥 세계유산이고, 이렇게 사람들 얼굴을 봤더니 검은 얼굴, 흰 얼굴, 머리카락도 굉장히 다양한 거예요. 막 떠밀면서 유적지를 봐야 할 그런 정도였는데 공주는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뭔가 조금 그렇게 세계유산도 확대하고 국보도 더 늘리고 보물도 더 늘리고 그런 방법들을 고민하면 어떨까? 그런 후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지산 유적일 수 있겠다는 거죠.

 

                                                                       웅진백제 왕궁 터는 어디일까?

 

옛날 사진이고, 지금 사진입니다. 경관이 이제 많이 바뀌었고요. 이 일대의 경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공산성 성벽은 사실은 언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조선시대에도 계속 성으로 이렇게 볼 수 있겠고요. 웅진 시기의 백제 궁궐이 어디인지도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나이가 열 살 많은 공주 일대 토박이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이 저를 이렇게 안내를 해 주셨는데. 예전에 구터미널이라고 했던 곳을 백제의 왕궁이야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남석 선생님이나 안승주 선생님이 살아 계셨는데 그분들이 발굴하시고 여기가 백제궁궐이야~. 오랫동안 공주박물관에 근무하신 이규선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도 계셨어요. 그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며 , 다 틀렸어~ 내가 생각할 때는 안 선생님 말이 아닌 것 같아, 여기야, 여기~’ 그러는 거예요. ‘옛날에 땅을 깊게 팠는데 저 땅속에서 큰 주춧돌이 나왔어, 확실해~’ 그러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민가가 엄청 많았어요. 민가가 꽉 들어차 있었어요. 그래서 민가가 다 이제 밖으로 나가고 공주대학에서 근래 계속 발굴을 했잖아요. 흙이 정말 많이 퇴적되어 있었고 밑에서 건물들이 쫙 나왔고 연못

 

 

                                                                                  <공산성과 정지산>

같은 데서 갑옷도 나오고 그랬잖아요? 제가  지난번에 백제 최후의 날그렇게 썼는데 백제 최후의 날이 여기에서 의자왕을 이렇게 맞이했던 것 같은데. 그때 발굴해 봤더니 여기에는 주로 백제 관공서, 사비 시기의 관공서가 쫙 나왔어요. 최근에 공주대 이현숙 선생님과 상의해 보고 지난번에 발굴 현장을 또 한 번 가봤더니 이괄의 난과 관련 그 스토리가 있는 쌍수정 그 아래쪽에서 흙을 막 다져 올린 층이 확인되었다고 해요. 아마도 거기에 뭔가 백제의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50, 60, 몇 번 까지 될지 모르겠지만 좀 더 발굴이 많이 되면 정확하게 백제 궁궐이 어디 있었고 관공서가 어디 있었고 도로가 어떻게 났었고 그런 부분들이 다 좀 밝혀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백제의 공산성이나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잔디를 쫙 심어서 정비를 해 놓잖아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조사하지 않은 게 엄청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그렇게 앞으로도 연구가 무궁무진하다고 봅니다. 보통 백제 석촌동 고분 그러면 무덤이 하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무덤과 무덤 사이가 쫙 닿아있는 거예요. 공주종합운동장에 무덤이 있으면 끝까지가 다 무덤인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무덤이 이어져 있어요. 그걸 연접군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새로 밝혀진 거예요. 왕릉들이 있고 그 사이에 무덤이 작은 무덤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경주를 가면 경주 시내 천마총, 황남대총, 큰 무덤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 무덤만 있는지만 알아요. 그런데 그 사이를 발굴했더니 사이에도 무덤이 가득 있어요. 무덤 위를 발굴했더니 거기도 무덤이 많아요. 그냥 고분 밭이에요. 무덤 위에 또 쓰고 무덤 위에 또 쓰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공주 왕릉원은 그런 단계를 이미 벗어난 단계에요.

 

                                                          악기 줄 같이 역사유적이 연결된 도시 공주가 되었으면

 

정지산 잠깐 설명을 드렸잖아요? 이것도 어느 날 우연히 이렇게 발굴된 거예요. 그 당시에 제가 발굴을 하다가 사무실에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발굴 현장에는 아르바이트 학생들만 남아 있었어요. 사무실에서 공문 하나만 들고 왔더니 다 파버렸요. 그래서 일부 유적이 훼손되었어요. 건물을 보통 지을 때는 기둥을 여섯 개 열두 개 이렇게 되는 데, 기둥이 50 몇 개가 있는 난생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나온 거예요. 궁궐이나 대통사 이런 데에서 쓰이는 기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화려한 그 제기, 그런 것들이 잔뜩 무더기로 나왔어요. 그래서 이 정지산 언덕이 백제의 왕과 왕비의 빈전이라는 학설을 내세웠습니다. 이스탄불을 가면 가운데 그 해협 같은 게 있고 강 같은 곳이 있는데 큰 도로가 악기 줄 같이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떠밀려 다닐 정도입니다. 모든 유적들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커피도 사 먹고 쇼핑도 하고 책도 사보고 그러잖아요? 공주 시내도 관광객들이 걸어서 유적지를 둘러보는 이런 공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신용희 기자>

 

교수님께서 1997년에 정지산 발굴, 96년에 발굴하셨잖아요? 그때 공주대 박물관 회의가 있었어요. 교수님께서 그때 설명을 해 주시고. 저희멤버들이 가서 설명 듣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정지산은 무령왕릉 비에 지금 빈전이라고 하시고 논문도 쓰셨잖아요? 근데 조금 아까 일부 학자들이 그 정지산이 왕비의 빈전이 아닌 다른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물론 교수님은 빈전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그곳을 어떤 유적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수님께서 빈전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시는 거죠?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인지 그것만 얘기 좀 해 주세요.

 

                                                                 <답변, 이한상 교수>

 

. 25년 전 일 것 같아요. 근래에 저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세 그룹이 있습니다. 한 그룹은 정지산 유적은 백제의 산성 방호시설일 거야.’ 왜냐면 제가 발굴하면서 목책이 나왔다고 발굴보고서를 썼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생각하니까 잘못 표현한 거예요. 목책이 아니라 나무 울타리였어요. 기둥 구멍이 이만합니다. 보통 목책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성책처럼 기둥 구멍이 커야하고 보통은 두 줄로 짜요. 기둥이 쭉 성체처럼 서는 건데. 여긴 작은 나무 울타리에요. 성이라는 건 뭐에요? 공산성처럼 사방에서 격리된 공간이라야 되잖아요. 정지산 가보시면 이렇게 밑에 차를 대고 요양원 쪽에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이 정지산이잖아요. 왼쪽이 더 높아요. 거기서 활을 쏘면 다 죽어요. 그게 방어시설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 저를 비판하는 견해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지금 공산성을 발굴해 보고 추정 왕궁지인 쌍수정 있는 쪽, 그 뒤쪽 주변에 어디 있지 않을까 이런 추정이에요. 공산성을 발굴했던 공주대학 선생님들은 아직 발굴은 되지 않았지만 그게 유지라고 되어 있잖아요. 거상재유지(居喪在酉地). 왕궁의 서쪽. 바로 정전의 서쪽 건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를 발굴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모르는 거예요. 그냥 그런 추정이 하나 있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충남대학 박순발 선생님, 그리고 도쿄대학에 있는 분들이 저를 비판하는 것은 영빈관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거기서 유물들이 많이 나왔거든요. 일본 유물, 전라남도 고창에서 만든 유물, 전라남도 나주에서 만든 유물, 경상북도 고령에서 만든 유물, 이런 것들이 다 같이 나왔어요. 유물 가운데는 거의 백제의 국가시설에서만 쓰일 수 있는 기와, 무령왕릉 전돌하고 똑같은 전돌, 그런 게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백제에 국가차원에서 만든 시설인데 게스트하우스일 거야한 거예요.

근데 게스트하우스가 되려면 궁궐 옆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야 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의 신변을 지켜줘야 될 게 아니에요. 외국에서 온 사절.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 우리 시내 나가서 술 한 잔 하자. 물론 알 수는 없어요. 그 당시에 시내에 나가면 술집이 쫙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풍악도 울리고 뭐, 이러려면 정지산 산꼭대기에서 게스트하우스는 좀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저를 비판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경우는, 중국의 예기, 의례 이런 책에 보면 대개 궁궐 언저리에 빈전을 만들어서 그 빈례를 치러요. 건물이 이렇게 높으면 서쪽의 계단에서 이렇게 관을 모시고 빈례를 치는 경우도 있어요. 그것하고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중국의 의례라고 하는 것도 한국에 그대로 백 % 들어오지는 않아요. 그래서 백제 3년상이라고 하는 것도 중국과 다르잖아요? 실제 일본의 경우는 일본서기에 백제의 빈과 관련된 백제 대빈 이런 표현도 있고요. 일본의 빈례는 기본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빈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슬픈 공간만은 아닌 것 같아요. 빈례는 어쨌든 빈이라고 하는 기간을 통해서 아버지의 유해 관을 놓아두고 그다음 계승자가 본인이 그 의례를 주관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가는 기간이에요. 그래서 일본의 왕권이 약할 경우에는 5, 6년까지도 빈 기간이 길어져요. 일본서기의 보면 궁궐 앞뜰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뒤뜰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궁궐 바깥쪽에 하는 경우도 있고 궁궐의 북쪽 산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게 모두 다 어떻게 보면 백제의 빈례가 일본으로 건너간 케이스잖아요. 그래서 일본은 그걸 모가리라고 부르는데 일본의 모가리 의례에 관한 연구가 많이 있어요. 그런 걸 보면 그런 연구에서 무령왕릉 또 무령왕비의 빈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거든요. 어쨌든 기존의 연구대로 하면 발굴이 안 된 자료를 나중에 추정하는 게 있을 수 있고 중국적인 그 시각을 그대로 백제에 적용하려고 하는 측면도 있고, 정지산을 가보지 않고, 보고서만 보면 아, 이거 목책이 있고 방어시설이구나, 정지산에 가보면 그게 방어시설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요. 저기서 화살을 쓰면 난 다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걸 가지고 기존에 제가 논문 한 두 편 밖에 안 썼습니다만 앞으로 좀 더 연구해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문, 조옥순 해설사>

 

공주문화원에서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면 학예사로 있을 때 무령왕 귀걸이를 달아 보셨는데, 한쪽은 스물두 돈, 한쪽은 스물 세 돈이더라, 그래서 그 강의를 듣고 저희가 관광객한테 그렇게 했는데, (틀렸죠) 박물관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달라요. (맞아요) 그래서 확실하게 한번 여쭤보고 싶어요.

 

                                                                          <답변, 이한상 교수>

 

(웃음) 정말 따끔하고 좀 가슴이 딱 아픈 정곡을 찔러주셨어요. 제가 공주박물관에 있을 때 무게를 달아보고 그걸 메모를 해서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3.75g으로 나누어서 봤더니 그때 막 설명했더니 저한테 ]무게가 틀렸어요.' 그러는 거예요. 그 데이터를 가져와 봐, 그래서 봤더니 그분들이 지금 무게를 잰 거하고 그 당시 제가 잰 게 다른 거예요. 경주박물관 에 있을 때 신라 금관 무게를 달아 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희 선배들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왜 왜요? 제가 그렇게 했더니 만약에 네가 올해 달았는데 900그램이라고 했는데 내년에 저울에 문제가 있어서 800그램으로 나오면 너는 100그람을 빼먹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 무게를 어떻게 달까?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걸 통째로 달고 나중에 상자 무게를 빼면 된다는 건 몰랐어요. 지금은 해보니 그런 식으로 무게를 달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질문,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

 

시간이 조금 안 됐기 때문에 한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은 아니고요. 부탁 말씀 드리려고 그러는데. 제가 퇴직한 지 7년 됐어요. 근데 그동안에 제일 제가 열심히 한 것은 강의를 듣는걸, 그래서 특강 많이 지금도 듣고 있고 오늘도 이제 맞습니다마는 지금 아까 7년 동안 들은 특강 가운데 가장 유익한 시간이었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고. 최근에 제가 많이 상심했어요. 정지산 유적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정지산 유적을 딱 가지고, , 이게 굉장히 참 중요한 부분이다. 그 부분을 좀 같이 공유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곤 했었는데, 요즘 와서 빈전에 대한 이야기하는 연구자들을 못 봤어요. (저만 가끔 신문에, 누가 비판하지 않을 때) 사실 궁금했던 건 이한상 교수이 또 변심했나.(저는 아니) 했는데, , 안심이 많이 됐고요.

그게 중요한 게 뭐냐면 지금 백제 세계유산이 전체 여덟 개 유적이잖아요. 여덟 개 유적인데 앞으로 확장하는 것.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럼 공주도 더 늘어나야 되고 부여도, 익산도 늘어갈 건데, 그 리스트를 봤더니 공주는 후보리스트가 몇 개 안 되고 부여는 지금도 많지만 잔뜩 늘어났고 익산은 더 많이 늘어날 것 같아요. 공주가 자칫하면 지금도 적은 데다 새로 추가 지정하는 것도 제일 적을 가능성이 지금 굉장히 많더라고요. 이제 수촌리 유적은 되겠지만 두 번째 후보는 정지산 이잖아요. 그런데 정지산도 빈전이다 아니다 그러면은 날아 갈 가능성이 많잖아요. 어쨌든 빈전이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누가 아주 단정적으로 아니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빈전이 아니라는 걸 단정적으로 하는 그 양반들이 장사 치룰 때 본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보지도 않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얘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제가 부탁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정지산에 대해서 계속해서 좀 말씀을 해주시고, 또 그걸 논문으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좀 정리를 부탁을 드리고 싶고, 또 우리도 상황이 어떤지를 같이 알고 후원을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취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답변, 이한상 교수>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공주시에서 돈을 아마 한 5, 6억 정도를 투자하셨어요.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에서 두꺼운 책 2권이 나왔고요. 정지산이 아까 그 건물을 보여드렸잖아요. 건물의 그 전체 복원도도 새로 만들었어요. 실제 건축학 전문으로 하는 분들이 만들어 보니까 이 건물은 일반 일상용 건물이 아니라고 이런 결론까지 내셨어요. 아마도 특수한 데, 빈전, 이렇게 얘기하면 또 활을 막 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거기서도 약간 백제의 왕실 제사유적 이렇게까지는 분명하게 되어 있어요. 나머지 화룡점정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좀 더 노력해서 빈전 설을 확정적으로 그렇게 좀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송두현 전 공주시 계장>

 

정지산 발굴할 당시에 공주시에서 도로계장을 했습니다. 설계를 할 때 지금 교량을 보시면 강북쪽이 좀 낮고 정지산 쪽이 조금 높습니다. 설계를 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50미터가 넘는 도로는 터널로 들어가고 50미터가 안 되는 것은 절개로 해서 설계를 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는 50미터가 안 되게 위해서 처음에 절개하는 걸로 했습니다. 저쪽이 낮고 높게끔 이렇게 해서 설계까지 다 하고 시공까지 하고 있는데 중간에 정지산이 발굴이 된 거에요. 저는 그때 개발측면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정지산의 중요성을 잘 몰라 가지고 국토관리청 직원들하고 문화재위원분들을 설득해서 그냥 절개식으로 했었어요. 그때 당시에 문화재위원들하고 공주사랑모임에서 적극 반대를 하셨어요. 결과적으로는 이제 당초 설계대로 하지를 못하고 터널식으로 시공을 하다 보니까 왜 교량을 그렇게 해놨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저는 백제 큰다리라고 하는 이름은 백제권종합개발계획에 의해서 국도 40호가 이쪽 주미 쪽으로 해서 부여까지 백제큰길이라고 해서 났는데 백제하고 연상되는 다리 이름을 붙이라고 하다보니까 부여에 이미 백제대교가 있어요.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 큰 다리 해 가지고 제가 백제 큰 다리라고 이름을 붙여 국토관리청에 건의를 해서 백제큰다리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사연이 그렇게 돼서 공유를 좀 하고 싶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답변, 이한상 교수>

 

그때 그러면 저하고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때 사진이 제가 이렇게 집에 보니까 있더라고요. 그 당시 감리단장님이 큰 역할을 하셨어요. 어떤 거냐면 문화재 위원님이신 유무병 선생님하고 그다음에 안승주 선생님도 계셨고. 장경호 선생님 이런 분들이 계셨는데 이러셨어요, 저희는 기술이 너무 좋아서요, 유적을 툭 빼서 옆에다 옮겨드릴 수 있어요,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그랬더니 이 어르신들이 유적은 옮기면 의미가 없어,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냥 그걸 유적으로 지적, 윤무형 선생님은 좀 몸이 불편하셨는데 포클레인 타고 산 위에 올라가서 보시더니 이렇게 중요한 유적이 있었어.’ 그러면서 문화재위원회에서 보존결정 한 거예요. 그때 그 당시에 관여하셨다니 반갑습니다. . 그런데 그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산성 달밤이야기는 공산성 계속되는 호우로 인하여 성곽붕괴로 성곽 밟기를 하지 못하고 공산성 방문자센터에서 진행되었다. 공주시 음악협회 울림의 작은 음악과 함께 2시간 토크방식으로 진지하고 재미있게 추진되었다. 이 행사는 문화재청과 공주시, 충청남도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재안전연구소(소장 이태묵)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블로그, T스토리와 유튜브(금강FM, 한국문화재안전연구소)에서 다시 보기할 수 있다.

 

 

<강의 내용 이태묵 정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