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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푸르른 오월 초이레 달이 뜬 공산성 달밤에 부른, 공광규 시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시 이야기

지난 토요일(6. 24.) 공산성 이야기는 공광규 시인의 시간이었다. 이 푸르른 오월 초이레 달이 뜬 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서 어려웠던 지난날 우리들의 삶을 불러내어 함께 시를 읽고 노래한 기억을 애잔하게 만들었다. “공주와의 인연, 공주의 이웃 청양, 잘 살아보려 고군분투한 아버지, 별국을 끓어주셨던 어머니, 고향에 남아 있는 빈집과 논밭들은 모두가 시()로 묘사되고 있었다.

 

 

 

 

1. 공주와 인연

 

먼저, 이곳 공주에 왔으니까, 공주에서 시의 발상을 얻거나 쓴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놀란 강><루치아의 뜰> 두 편입니다. 공주는 제 고향 청양과 이웃으로 이곳과 인연이 많습니다. 공주와 청양은 이웃이어서 혼인으로도 엮이고 학교로도 엮입니다. 청양에 인문고등학교가 없으니 공주로 고등학교를 오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갔는데, 청양과 부산을 오고갈 때 공주 시외버스정류장을 들려야 대전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공산성도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충남시인협회 활동을 하고 있어서 여러 번 공주에 들렸습니다. 아무튼 공주 금강 변은 버스나 승용차로 수없이 오고 갔습니다. 오고가면서 금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저한테 가장 익숙한 강은 금강입니다. 시의 많은 부분에서 아름다운 금강을 묘사한 시가 <놀란강>입니다.

 

<놀란 강>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 천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 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이 시는 4대 강이 정부의 토목사업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생태를 파괴하는 것을 비판하는 시였습니다. 시 문장에 아름다운 강의 모습이 계속해서 묘사되는데, 제가 가장 잘 아는 금강을 떠올리며 묘사를 한 시입니다. 국토의 아름다운 강바닥과 언덕이 포크레인으로 훼손되는 것을 고발한 시입니다. 다음 시는 <루치아의 뜰>입니다.

 

<루치아의 뜰>

 

직선의 기둥과 곡선의 석가래가

나와 당신이듯 만나

옛집을 세운

제민천변 루치아의 뜰 가는 길

 

오래된 골목에 들어서면

맨드라미가 껑충한 수탉처럼 서서 비를 맞고

맑은 차나무 잎에

푸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집게를 흔들며

항아리를 기어 나온 게발선인장과

붉은 겹겹의 입술로 담장을 넘었을 줄장미 덩굴

나비를 가득 앉혔을 호접란 화분

 

아름다운 찻잔과 찻잔이

꽃잎과 꽃잎이

잎새와 잎새가

입술과 입술을 포개는 뒤란입니다

 

작년 가을 공주풀꽃문학관 앞 주차장에서 전국풀꽃시낭송대회를 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다가 마치고 들렸던 카페가 루치아의 뜰입니다. 비가 왔었고, 풀꽃문학관 언덕에 섬초롱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기억이 납니다. 옛 집을 리모델링한, 석가래가 아름답고, 찻잔이 아름답고, 정원이 자연스러운 집이어서 시를 한 편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뒤에 충남시협 임원회의를 공주에서 열었는데, 다시 이 카페에 들렸습니다. 시를 써서 <<시와소금>>이라는 잡지에 발표를 했고, 주인은 그 시를 나무에 파서 달아놓았다 하니, 카페에 가시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공주의 이웃 청양

 

청양은 제 고향입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위 대는 부여군 은산면 억새골에 묘가 있었던 것 같고, 어려서 벌초를 하러 다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고향은 청양군 사양면 대봉리(현재 남양면)이고 어머니 고향은 화성군 장계리입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채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증언입니다. 두 분은 시골에서 결혼 후 서울로 상경해 삼선교 건너 돈암동 아래 사셨고, 저를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돈암동 출생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음력 38, 양력 43일애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시골 면사무소에 늦게 출생신고를 하면서 주민등록상 생일은 615일이 되었습니다. 농담으로 아버지가 서울에서 청양까지 아들 출생신고 하러 걸어가는데 212일이 걸렸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당시에도 출생신고를 늦게 하면 벌금제도가 있었는지, 아버지가 벌금을 피하려고 출생일을 속였는지 좀 아쉽습니다.

저희 부모님이나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사람들은 제가 마땋이 615일에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615일만 되면 축하 문자를 보내옵니다. 그렇다고 사실과 다르다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번잡해서 그냥 고맙다고 답합니다. 생일 문제만 봐도 기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이나 역사나 민족도 사실보다는 기록이 중요하고, 기록 위에 세워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아버지는 뚝섬에서 새끼를 꼬아 파는 사업을 하다가 홍성읍 옥암리, 보령군 청라면 탄광촌으로 옮겨 살다가 고향인 청양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제가 쓴 청양 관련 제재 시는 거의 시집 한 권이 될 겁니다. 지금도 고향 청양이 시의 문장에 자주 들어옵니다. 먼저 고향에서 성장기 삽화를 그린 <얼굴반찬>을 소개합니다.

 

<얼굴 반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이 시는 중등국어3-1(비상교육), 중등기술가정(지학사), 고등사회문화(비상교육)에 실렸는데, 세태를 잘 묘사했기 때문일 겁니다. 현재 혼자 사는 노인가구가 엄청 많습니다. 시골에 가면 거의 노인들뿐입니다. 시골도 그렇지만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 시는 제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근교의 일산신도시에 살면서 쓴 시입니다.

시골이든 도시든 혼자 밥을 먹은 혼밥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같이 살아도 어른은 어른대로 돈벌이에 바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쟁에 휘몰려 같이 모여서 밥을 먹지 않고 혼밥을 먹습니다. 이전 농경사회에서는 모두 모여 밥을 먹었습니다. 식구나 이웃 얼굴을 앞에 두고 밥을 먹으니 풀잎 반찬도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많아져 고기반찬을 먹지만 혼자 먹으니 맛이 없습니다.

실태조사에 의하면 노인의 자녀 동거율은 1994년의 54.7%였는데, 2년 전인 2011년에는 27.3%로 급감했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단독 가구는 40.4%에서 68.1%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젊으나 늙으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트랜드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가구가 많다고 나쁜 사회는 아닙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회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다른 형식의 가족, 이를테면 같은 취미나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 느슨하게 모여 사는 유연가족시대가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과꽃잎 화문석>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먹은 친구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이 시는 어느 봄날 시골에 다니러 내려갔을 때 친구 기호 어머니께 인사를 갔다가 쓴 시입니다. 저는 시골에 내려가면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어떻게들 사시나 인사를 합니다. 제가 자란 청양의 고향 마을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이 시에 대한 설명은 황인숙 시인의 짧은 해설로 대신합니다.

 

친구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간 화자, 그 어머니가 한창 젊으셨을 때도 그 집을 드나들었을 테다. 온화하고 정갈한, 어쩌면 우아한 기품마저 감도는 시골 부인이 떠오른다. 누구나 가슴에 남는 친구 어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상(理想)의 어머니랄까. (무뚝뚝하고 드세고 욕쟁이인 내 어머니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차마 한 적 없을 테지만.) 그러할 친구 어머니가 쑥차를 내오시는데 손톱에 쑥물이 들어 있다. 초봄에 부지런히 쑥을 뜯으셨을 테다. 쑥국도 끓이고 쑥차도 만들고, 말려 두었다가 겨울이면 두고두고 쑥떡을 만들 만큼 많이도 뜯으셨을 테다. 반가이, 조금은 수줍게 친구 어머니와 마주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 집 마당을 내다보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을 테다. 모과꽃잎 흩날려 깨끗한 마당에 수를 놓누나. 딱따구리 소리, 꾀꼬리 소리도 화자 마음에 아롱아롱 수를 놓누나. 햇살 맑은 오월 어느 날의 남쪽 시골 마을 정경이 한 폭 그림같이 눈에 선하다.”(동아일보, 2013.4.5. 황인숙)

 

아무튼 아버지가 작은어머니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소송을 하러 다니셨던 공주, 대전을 나갈 때 거쳐 가는 도시 공주, 초중학교 동창들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공주, 시골 여자 동창이 시집을 왔던 공주입니다. 공주 문화권인 청양은 아래와 같은 마을입니다.

 

<청양>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가지를 섞고

잎과 잎을 맞댄 칠갑산

천장호에 원앙과 쇠오리가 산다

 

구기자나무와 맥문동 밭에

거름을 넣고 나온 당숙과 사촌이 어울려

어죽을 끓이는 느티나무 아래 평상

 

느티나무와 사람과 짐승의 배경이 되어주는

자귀나무꽃 노을이 아름다워서

인생의 저녁도 아름다울 것 같은

 

어깨선이 다정한 월산과 청태산과 구봉산이

어린 자매처럼 밤마다

초롱초롱한 별을 덮고 자는 마을이다

 

 

 

 

 

 

3. 잘 살아보려 고군분투한 아버지

 

오늘 주제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입니다. 아버지 관련 시로 <소주병><썩은 말둑>을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1933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을 겪었습니다. 청양에서 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결혼을 하자마자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서울로 이주, 서울에서는 돈암동과 뚝섬에서 살다가, 홍성과 보령을 거쳐 낙향해 청양에서 오십대 중반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난 뒤 절대 가난의 시대를 살다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의 속성상 친일매국을 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었으며,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사회주의 진영의 대리전장이었던 한국은 전 국토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의 후유증이 남긴 절대 가난 속에서 아버지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초상을 <소주병>이라는 시에 담았습니다.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이 시는 고등국어1(비상교육)에 실려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 때인 마흔 무렵에 쓴 시입니다. 술과 담배를 많이 하시다 오십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을 담은 시입니다. 동시에 이전 시대 보편적 아버지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해도 잘 살아지지 않는, 그래서 절망하고, 절망을 소주로 다스리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소주는 아버지들의 술입니다. 병 안에 담긴 내용물을 가족에게 다 쏟아 부은 후 버려지는, 소용가치가 끝나면 사회에서 버려지는 아버지를 소주병에 비유한 시입니다. 아버지는 청양에서 농사를 짓고, 광산에 다니고, 외지에 나가 고모부와 철근장사를 하고, 청양장 우시장 중개사(우리말로 거간꾼, 영어로 브로커)를 하시다, 폐암으로 서울 백병원에서 치료하시다 포기하고 청양 시골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요즘은 암에 걸려도 치유울이 높지만 80년대 후반에는 고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버지는 가난 속에서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던, 한 집안을 받치려고 안간힘을 쓰셨던 아름다운 기둥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어머니 혼자 논밭 농사를 지어야했습니다. 저는 가끔 내려가 도울 뿐이었습니다. 논은 경지정리를 하기 전이어서 장마철만 되면 논둑이 무너졌습니다. 이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그러 올리며 쓴 시입니다. 아버지가 오래전에 박아놓은 말뚝이 삽날을 자꾸 물어서 착상한 시입니다.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 하고 운다

 

 

 

4. 별국을 끓여주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저도 죽음을 처음 체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4살 아래 남동생이 어려서 죽었습니다. 부모님이 농사일을 나가면 집에서 제가 동생을 봐 준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를 일으킨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었고, 저는 시 <애장터>를 썼습니다.

 

<애장터>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마을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

누군가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

으로 가면

도라지꽃이 물방울을 매달고 서럽게 피어 있었다

 

아시다시피 별국은 제가 만든 조어입니다. 만든 단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별국이라는 음식은 없습니다. 제가 발명한 음식입니다. 당시 고등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봐야하니 도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왔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궁이가 있는 부엌에서 밥을 데우고 국을 데워서 마루나 밀짚자리를 깐 마당에 상을 차려다주셨습니다. 건더기가 없고 국물이 많으니 좀 과장해서 하늘에 있는 별이 비치고 달이 비쳤습니다. 이런 기억을 시로 쓴 것이 시 <별국>입니다.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이 시는 중등국어2(좋은책신사고)에 실렸습니다. 중등 국어시험 문제에도 종종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와 같은 제목의 그림책 <<별국>>을 내기도 했습니다. 다음 달에 익산 부송중학교에서 이 시그림책을 가지고 작가와의 만남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역 서점을 통해 <<별국>> 100권을 구입하겠다고 하니 좋은 일입니다. 제가 그동안 시그림책 8권을 냈으니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보시고, 졸작들이지만 많은 아이디어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골에서 거의 20여년을 혼자 사시다가 일흔 하나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청양 읍내에 있는 법성암이라는 절이 다니셨습니다. 비구니가 주지인 그 절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천도제도 하고, 아마 어려서 죽은 아들 천도제도 했을 겁니다. 그 절에서 자식들 이사 날짜도 잡아오고, 부적이나 색실과 붉은 팥을 가져와서 집에 붙이기도 하고 제 지갑에 넣어주셨습니다.

나쁜 귀신이 제 몸에 따라붙지 말라는 어머니의 정성이셨겠지요. 그 색실과 붉은 팥은 아직도 제 인감도장집과 노트북을 넣어서 메고 다니는 백팩에 있습니다. 아무튼 시 <법성암>의 내용처럼 어머니는 저를 작은 부처나 높은 석탑처럼 모셨습니다. 어머니가 감히 이 못난 놈을 모시다니, 어머니의 고독을 외면했던 죄가 아주 크고 크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법성암>

 

늙은 어머니를 따라 늙어가는 나도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법성암 부처님께 절하러 갔다.

납작 납작 절하는 어머니 모습이

부처님보다는 바닥을 더 잘 모시는 보살이다

평생 땅을 모시고 산 습관이었으리라

절을 마치고 구경삼아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법당 연등과 작은 부처님 앞에 내 이름이 있다

절 마당 석탑 기단에도

내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다니며 시주하던 절인데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아름다운 연등으로

작은 부처님으로

높은 석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5. 고향에 남아 있는 빈집과 논밭

 

고향 청양에는 빈 집과 논밭이 남아있습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은 잘 수 없습니다. 논밭은 사촌이 짓고 있고, 어느 밭은 오랫동안 묵어 산에서 내려온 큰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고향에 대한 경험과 감정을 시로 쓴 <모텔에서 울다><담장을 허물다>를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텔에서 울다>는 제가 졸업한 청양 동영중학교에 강의를 갔다가 쓴 시입니다. 눈이 많이 왔던 어느 해 겨울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고향 집이 오랫동안 비어있다 보니 잘 곳이 없었습니다. 보일러는 터진지 오래고, 죽은 노래기와 죽은 거미와 흙먼지가 방바닥을 덮고 있었습니다. 당숙이나 사촌 집에 가서 자기도 그렇고, 결국은 청양읍내에 있는 모텔에서 잤습니다. 시골에 집이 있는데도 집에서 자지 못하는, 그래서 치미는 슬픔과 감회를 시로 썼습니다.

 

<모텔에서 울다>

 

시골집을 지척에 두고 읍내 모텔에서 울었습니다

젊어서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처럼

첫사랑을 잃은 칠순의 시인처럼

이젠 고향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베개에 묻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오래전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가 끊긴

텅 빈 시골집 같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폭설에 지붕이 내려앉고

눅눅하고 벌레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쭈그러진 몸을 내려보다가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수십 년을 가방에 구겨 넣고 온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지우려고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체온 없는 침대 위에서 울었습니다

 

어지럽게 내리는 창밖 흰 눈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빠져나간 늙은 유곽 같은 몸을 후회하다가

불 땐 기억이 오래된

컴컴한 아궁이에 걸린 녹슨 솥의 몸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울었습니다

 

아래 시 <담장을 허물다>는 고향에 내려가 시골집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축적한 정보를 재구성해 쓴 시입니다. 시를 쓰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유장한 서사와 호방성 때문입니다. 시와 같은 제목의 시그림책으로도 냈습니다. 이 시를 쓰고 나서 서사시를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서사시 금강산>><<서사시 동해>>를 냈습니다. 민족을 주제로 대형 서사시를 써서 어떤 민족적 기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다른 서사시를 구상 중인데, 제 시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 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내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6. 박물관 관람과 성곽 걷기

 

오늘 행사를 시작하기 전, 고속열차(KTX)로 미리 공주에 내려와 풀꽃문학관에 들렀습니다. 나태주 선생님께 드리려고 최근에 나온 시그림책 <<별국>><<하늘 그릇>>을 가지고 왔고, 유정란 10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유정란은 어제 저녁에 서울 노원구에서 시를 쓰는 분이 30개를 주신 것인데, 그중 10개를 덜어왔습니다. 그냥 계란이 아니고, 그분의 남편이 포천 농장에서 놓아먹인 여러 종의 닭이 낳은 유정란이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고, 이렇게 먼 거리까지 값싼 계란을 가져온다는 것이 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이 공주나 청양에서 있을 수 있는 시골스러운 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 행사 기획자인 이태묵 선생님과 풀꽃문학관에서 만나 국립공주박물관과 웅진백제역사관과 무령왕릉을 둘러봤습니다. 국내외 많은 박물관을 다녀봐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박물관 유물들이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역사와 연관이 있고 교류가 잦았던 이웃 중국이나 일본 유물관도 따로 있다면 볼거리가 많고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이태묵 선생님과 같이 했습니다.

제가 청양 고향 동네에서 주운 청동기 화살촉이나 홈자귀와 같이 모양이 좋은 것도 없었습니다. 아직 유물 수집이 그렇게 잘 되지 않았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절차를 거쳐 기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 시간 전에 조옥순 해설사 선생님과 같이 이곳 공산성 성곽을 밟으며 걷는 성곽문화체험에 참여 했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맨발로 반쯤 돌았습니다. 이미 1994년부터 영동 영국사에 김성동 소설가가 방을 빌려 머물 때 천태산 맨발 산행을 처음 시작했는데, 앞으로 공주에 올 일이 있으면 맨발로 산성을 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푸르른 오월 초이레 달이 뜬 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서 여러분과 같이 시를 읽고 노래한 기억을 인생의 큰 자산으로 삼아 잘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광규 시인은 조옥순 공주시 문화해설사와 함께 공산성 성곽을 돌아보았다. 쌍수정에서 공주대 음악교육과  송희재 학생의 플롯연주와 김혜진(보컬), 하경진(키보드)로 이루워진 작은 음악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이 행사는 문화재청, 공주시, 충청남도가 지원하고 (사)한국문화재안전연구소(소장 이태묵)가 주관하며, 유튜브(금강fm- 공산성 달밤이야기 검색)를 통해 이행사를 다시 볼 수 있다. 

 

<글 이태묵 옮김>